어느 학부모의 소소한 투표 사연

2012.12.22 00:50

nobami 조회 수:2449

어저께 같은 동네 사는 친구를 만나 들은 이야깁니다.

친구는 진보신당 당원인 40대 아저씨입니다. 초등학교에서 학운위 운영위원도 하고 있는데요, 
몇 달 전에 그 학교의 몇몇 아이들 사이에 폭력 왕따 사건이 벌어져서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온갖 소동 끝에 어찌어찌 하여 사태는 우울한 방식으로나마 해결되었는데(가해자들 일부 전학),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학생은 생활기록부에 그 기록을 남기고 졸업한 뒤에도 5년까지 보존한다는 교과부 방침이 있죠. 무려 초등학생들부터. 
이 문제를 놓고 지금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과 교과부가 전쟁을 벌이고 있답니다. 교육감 측에선 '어린 학생들을 전과자로 취급하는 정책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인 것 같고요.
일선 초등학교들은 죽을 노릇이랍니다. 하루는 교과부에서 협박 공문이 날아오고, 다음날은 교육청에서 쫌만 더 버텨라 쫌만 버텨라 하는 급전이 날아오고 말이죠. -_-  

친구가 학운위를 하다 보니 가해자 학부모와도 대화할 기회가 많이 있었죠.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만 부모들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입니다. 
자기 아이가 잘못한 건 맞는데, 그렇다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큰 죄를 진 건 아닌데(친구가 보기에도 전학까지 보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좋다 그럼 전학까지는 수긍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5년간 전과기록 남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사실 아이가 일반 중고등학교로 진학한다면 아이 개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국제중이나 자사고 특목고를 가려고 하면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군요. 서류 면접에서 떨어질 확률이 확 높아지니까요. 

친구는 학부모님께 누차 말씀드렸죠. 문재인 찍으시라고, 정권 바뀌면 교과부 방침도 다 바뀐다고.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돼서 
친구도 멘붕 부모도 멘붕 
쫌만더 쫌만더 버티고 있던 교장선생님도 멘붕멘붕 ㅠㅠ


통념과는 달리 문을 선택한 분들 중에서도 찾아보면 이런 불순한(?) 의도의 표들이 꽤 있을 수 있다는... ;; 
그 학부모님이 원래 박 지지자였는지 부동층이었는지, 실제로 어떻게 투표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만약 본인이 보수 성향의 유권자이고 아파트 값 때문에든 다른 공약 때문에든 박을 찍을 생각이었는데 
자식의 앞날 때문에 반대편 후보에게 내키지 않는 표를 주어야 했다면? 꽤 딜레마였겠습니다.

저는 정치의 진정성은 그 일관성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정책에 일정한 방향과 가치를 담아 꾸준히 밀고 나갔을 때 어떤 식으로든 수혜자들은 생겨나게 되고 그것은 그 진영에 귀중한 자산으로 남습니다. 
새누리당은 그렇게 알짜배기 자산을 열심히 쌓아 왔던 것이고요. 국민의료보험제도의 초석도 박정희가 놓았죠. 
진보진영에는 최근 들어 따낸 가장 귀중한 성과로 무상급식이 있군요. 오세훈을 졸지에 '애들 밥그릇 뺏는 놈'으로 만들어버린.
반면에 종부세... 참여정부 때 종부세로 자기 이익을 체감했던 계층이 확고히 있었던들 이명박 정부가 그렇게 쉽게 무너뜨릴 수는 없었을 테죠. 
정치인 개인의 인기나 덕망, 선한 의도로 인해 생겨나는 지지층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하지만 정책은 달라요. 물질적 이익은 다릅니다.
박근혜가 '아버지가 이룩한 경제성장을 딸이 복지로 돌려드린다'는 자연스런 컨셉으로 복지 프레임을 선점해 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 생생한 물질의 기억 때문이겠죠.
그를 지지한 이유가 그저 '불쌍해서' '이정희가 미워서' '공주님이라서'는 아닌 거예요.
진보진영이 박근혜 이후를 차근차근 대비했으면 합니다. 박이 실제로 국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물질은 지금 얼마 없잖아요.


여담인데 이 친구의 5학년짜리 아들내미가 박이 당선된 사태를 무척 애석해하고 있다는군요.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또 엄격한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모에하는 타입이라 아이한테 이렇게 말했대요. 
"이제부터 박근혜 박근혜 하지 말고 박근혜님 또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불러야 한다." 
아이가 시큰둥하자 덧붙여 왈 "일단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서 대통령이 되었으니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된다." 
꼬마녀석이 대답했습니다. 
"알았어.. 좋아. 그래도 우린 괜찮아. 김상곤 교육감이 있잖아."
요새 아이들 정말 정치화가 빠른가 봅니다. 저는 대통령도 호불호의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조차 고등학교쯤 가서야 깨달았던 것 같은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6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2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25
61807 엥? (제) 듀게 화면에 변화가 생겼어요 방은따숩고 2012.12.21 703
61806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노무현을 까는 글에 바라는 점 [15] 오맹달 2012.12.21 2165
61805 <주먹왕 랄프> 봤어여! (약스포?!) [8] 베레 2012.12.21 1871
61804 이제 넷 커뮤니티 분위기도 많이 바뀔 것 같습니다. [13] 가녘 2012.12.21 2990
61803 유아인의 트윗에 대한 어느 여고생의 생각 [21] 작은가방 2012.12.21 5985
61802 [고민]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대구에 사는 나. [9] 샐러맨더 2012.12.21 2100
61801 쇼스타코비치!!! [8] 부엔디아 2012.12.21 1269
61800 2012 올해의 장르소설은? 날개 2012.12.21 992
61799 [듀나인] 노빠, 친노 그리고 깨시민에 대한 질문 [19] amenic 2012.12.21 2740
61798 개인 넋두리 좀 써도 될까요? [3] Planetes 2012.12.21 1355
61797 2013년 1~2월 지상파 한국드라마 라인업 [9] 화려한해리포터™ 2012.12.21 3083
61796 NZT와 RXZ-19 라는 두가지 약에 대해 ...... 이거슨 영화 이야기입니다. 약 이야기가 아니에요. [2] 무비스타 2012.12.21 1615
61795 [공자왈 바낭] 인(仁)한 세상에 대하여 [8] 오맹달 2012.12.21 1111
61794 블로그 공개의 딜레마 [7] herbart 2012.12.21 1534
61793 오랜만에 동영상을 올려 보려 했더니 삑사리가 나서 포기하고 잡담. [1] keira 2012.12.22 726
61792 잠깐 쉬어야겠네요. [5] 룽게 2012.12.22 1702
61791 [바낭] 점점 괴상해져가며 산으로 오르고 있는 오늘 '위대한 탄생3' 잡담 [8] 로이배티 2012.12.22 2656
» 어느 학부모의 소소한 투표 사연 [6] nobami 2012.12.22 2449
61789 과거 다른 나라에도 독재잔존세력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적이 있었나요/레미제라블 [11] ML 2012.12.22 2741
61788 [바나] ㅇ 지구멸망 안해요? 시간 된 것 같은데.. 왜죠? [7] 고인 2012.12.22 212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