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겨울은 뜨거웠습니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죠. 현직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극악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통령을 싫어했고 그의 무수한 말실수는 조롱거리로 전락한지 오래였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풍자가 전국에 넘쳐났고 정권의 정책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지만 의회는 여권이 과반이라 민심이 전달될 통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권교체에 대한 여론은 그 무엇보다 높았습니다. 대통령과 반대당에 있던 후보의 모습이 더욱 정권교체의 여망을 떠오르게 했죠. 그는 애국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군인인 적도 있었고,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못 가진자들에 대한 애정이 뜨거웠고, 이를 표현하는 방법은 진중했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성격만큼은 인정했죠. 누구나 이번에는 정권교체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졌습니다. 전국을 뒤덮는 빨간 물결에 야권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철썩같이 믿었던 정권교체의 여망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사람들은 미칠것 같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이제 선거는 끝났고 최소 몇십년 동안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들려왔습니다. 마치 1980년대 후반의 선거때처럼 말이죠. 그렇게 사람들은 절망하고 체념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렇게 2004년의 겨울이 지나갔고, 조지 w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1.재미있으셨는지요. 의도된 글이었지만 어떤 분들은 중간부터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번 대선의 결과를 살펴보면서 문득 2004년의 미 대선을 생각했습니다. 한국의 2012년 대선과 2004년의 미 대선은 너무나도 유사했습니다. 현직대통령의 재선이라는 요소만을 제외한채 말이죠. 세대간의 대결이었고, 투표율의 응집력도 강했습니다.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전도 롤러코스터 처럼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 대선이 최악의 네거티브 전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의 후보.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문재인. 미국의 존 케리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도 비슷했죠. 애국적인 진보. 이 모든 것을 갖추고도 미국의 민주당도, 한국의 민주당도 패배했습니다. 열패감과 자괴감, 그리고 체념과 절망이 휘몰아쳤던 것도 사실입니다. 2004년의 미국에는 '부시를 재선 시켜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웹사이트가 생겼다고 하지요. 조만간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 마저 듭니다. 


2. 그러나 4년 뒤 미국 민주당은 정권교체에 성공했습니다. 버락 오바마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정권교체의 열망이 2004년 보다 더 열광적이었고.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결정적 계기가 있기도 했습니다. 카트리나 사태는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게 직격탄을 날렸지요.  그리고 2012년 그들은 정권을 연장하는데도 성공했지요. 

그렇다면 이 모든 이유들이 민주당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어 민주당은 숟가락 하나 들지도 않고 편안한 선거로 8년째 정권을 잡았던 걸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치란 생물에 가깝고 조금이라도 휘청하면 바로 복수하는 무서운 생물이기도 합니다. 미국 민주당이 정권을 교체할 수있었던 것에는 이 모든 호재들을 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역량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3.그 역량은 하나의 선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바로 2006년의 중간선거입니다. 미국 민주당은 하원 전원과 상원의 1/3을 뽑는 이 선거에서 유례없는 대승을 거둡니다. 1980년대 이후 미국 정치역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라고 일컬어지기까지하는 대승이었습니다. 미 민주당의 정권교체는 바로 이 선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흐름이 시작되었고 그 흐름에 버락 오바마가 올라타서 더욱 강해졌지요. 그러니까 미국 민주당이 2004년의 패배를 완전히 되갚고-공교롭게도 오바마는 바로 그 2004년 선거에서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중앙정계 진출을 시작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2006년 중간선거입니다. 


4.이 중간선거를 기획한 사람이 누굴까요. 두 명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한 명은 하워드 딘입니다. 그는 버몬트 주지사 출신으로 2004년 대선에서 존 케리에 맞서 민주당 경선에 출마했죠. 그는 당시 미국에서는 신선했던 인터넷 지지운동을 벌입니다. 그가 2002년 한국 대선을 참고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례죠. 결국 그는 패배했지만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당 사무총장과 비슷합니다. 중앙당이 없는 미 정당의 구조에서 이 직책은 선거의 기획을 짜고 큰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당 대표와 맞먹는 중요성을 가집니다. 하워드 딘은 이 자리를 차지했고. 바로 자신의 인터넷 지지 노하우를 미국 민주당에게 주입시킵니다. 2006년 중간선거와 2008년 오바마의 당선, 그리고 2012년의 재선까지 크게 보면 그 시작의 뿌리는 바로 하워드 딘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워드 딘은 무명의 일반 대중을 하나의 키워드로 조직해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해 내는데는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012년의 오바마 재선 운동 당시 오바마의 페이스 북에 좋아요라고 누른 일반 시민에게 다양한 형태로 그의 지지 성향을 분석해 관련 이메일을 쏟아냈던 것은 유명하죠. 하워드 딘은 바로 이것은 2004년부터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2006년 중간선거에서 대승을 기록합니다. 


5.다른 한 명은 람 이매뉴얼입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1대 비서실장인 그는 현재 시카고 시장으로 재직중에 있습니다. 이매뉴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워드 딘이 선거의 판을 짰다면, 이매뉴얼은 이를 구체화 시킨 사람입니다. 그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정책보좌관이었던 브루스 리드와 함께 작성한 '더 플랜(The Plan)'이 대표적입니다. 이 책에서 이매뉴얼은 2004년 대선 패배로 수렁 직전까지 가있던 민주당에게 반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진 것은 공화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못해서다" 라구요. 


6.이매뉴얼의 진단은 명확했습니다. 존 케리가 졌던 것은 현직 대통령인 부시의 대항마라는 것만 너무 부각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대항마에만 부각한 나머지. 미국의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정치인이 어떤 비전을 내놓기를 원하는지 알지를 못했다는 거죠. 이매뉴얼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하느냐, 어떻게 소통하는가 같은 '프레임'이 아니라 어떤 비전을 보여주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여줘야 한다"라고요. 이 책에서 이매뉴얼은 바로 그 비전을 보여줍니다. 향후 민주당이 어떤 정책을 마련해야 하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것을 통해 누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를 논리 정연하게 보여주죠. 저는 현대 정치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말고도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 진보진영의 사람들이 대선 패배에 휘말려서 '멘붕'에 빠져있습니다. 향후 수십년간 진보의 재집권이 어려울 것이라는 한탄이 들려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연령층의 급속한 증가로 인해 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이번 대선의 세대별 투표율과 지지율을 2002년 대선에 적용했다면 문재인 후보가 오히려 이겼을 것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도 있지요. 2017년 대선은 이 고령화가 더 심해질 것이고, 진보진영은 '종북'과 '과격'이라는 프레임에 갖혀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팽배합니다. 기울어진 언론 환경과 보수화되는 사회 환경이 이같은 불길한 예측에 힘을 더해줍니다. 


8. 저는 저 생각이 일견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부인은 못하니까요. 하지만, 한국의 민주당이 람 이매뉴얼이나 하워드 딘 같은 '더 플랜'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4년의 미국보다는 우리의 환경이 더욱 암울하고 가능성이 없어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껍니다.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몰아준 50대는 불과 10년 전 노무현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이들은 스윙보터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5년 뒤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또 모릅니다. 그리고 많은 언론에서는 이 50대의 투표 성향에 대해서 '안정 지향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을 원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지요. 


9.한국 민주당이 지금 부터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저는 '플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민주당 역시 2012년의 대선에서 '프레임'에 빠져 실패했다고 진단하기 때문입니다. 진보는 정권교체라는 여망에만 사로잡혀 우리를 찍으면 내 생활에서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기울어진 언론환경 탓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상쇄시키지는 못합니다. 어찌되었던 민주당은 국민들을 설득할 비전을 꺼내주지 못했고. 프레임에만 사로잡혔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본인들이 사상 최약의 보수라고 칭하는 후보한테 1:1 정면으로 붙었음에도 100만표 이상으로 철저하게 진 원인일 것입니다. 


10. 민주당에게 '플랜'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손학규가 제시한 '저녁있는 삶'은 슬로건 자체로도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오죽하면 평생을 철저한 반공투사로 살고 잇는 제 형 마저도 손학규가 대선후보로 나온다면 찍겠다고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민주당은 지금부터라도 '저녁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어떻게 비전으로 구체화 시켜야 하는 지를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슬로건은 아직도 살아있고 중도층을 흔들만한 위력이 있으니까요. 이매뉴얼이 그랬듯이 진보진영도 이를 비전으로 정리해서 국민에게 "생활이 바뀔 수있다"라는 것을 설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희망의 첫 걸음입니다. 


11. 하워드 딘의 인터넷 지지 운동도 민주당이 해낼수있는 전략적 고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만 하더라도 하루에 수천명이 그의 글에 댓글을 달거나 추천 버튼을 누릅니다. 이들은 심정적인 진보진영의 지지자들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상으로 이들을 세대별. 지역별. 연령별. 직업 별 등등으로 구분해 상황에 맞춘 개별적 공략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민주당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입니다. 카톡 메시지나 트위터도 비슷하게 이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는 박근혜 쪽도 마찬가지겠지요- 


12. 언제나 지는 쪽은 후폭풍이 있고 계파간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민주당 내부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은 정당정치제 국가에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을 준비하고 기약하는 행위는 계파를 초월해야 겠지요. 이 역시 박근혜 쪽과 마찬가지겠지요. 민주당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 대선의 분수령이 될 지방선거는 이제 겨우 1년 반이 남았고, 민주당 소속 광역자치 단체장들은 이번 대선결과만 보면 지방선거에서 줄줄이 낙선할 처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민주당의 플랜도 제대로 작동할 기회를 놓칩니다. 2008년 미국 민주당의 승리는 2006년 중간선거 승리 후 민주당이 플랜을 차근 차근 집행해 나가면서 그 가락이 깔렸습니다. 이 땅위의 진보가 이 어려운 전장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상한 각오와 흔들림없는 의지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시작할때입니다. 민주당의 '플랜'을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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