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사견 바낭) 요리에 대하여

2012.12.27 22:10

MSG 조회 수:5205

글 붙여오기가 될려나 모르겠네요.. 쓰다 보니 쓸데없이 길어져서. 

등업신청하고 바로 대선정국에 휘말려.. 편안한 글을 올리기가 어려웠어요.

이 게시판 자체가 아직은 무섭기도 하고.하하하.  




말하자면, 저는 아이들(학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요리라 함은 재료손질에서 부터 조리, 그리고 조리후의 설겆이, 싱크대 주변의 물기까지 말끔히 닦아내는 과정을 말합니다. 행주를 빨고 삶아 햇볕에 널어 놓으면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겠죠.

 

일년에, 한 두 번 형식적으로, 샌드위치, 김밥 따위나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가르쳐, 대학을 갈 때 쯤에는 밥과 국, 찌개, 반찬류를 어느 정도는 만들 줄 아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학생 뿐 아니라, '특히 남학생들'에게 이 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이겠습니다. 

 

요즘은 학교마다 급식 때문에 조리시설도 되어 있겠다.. 아예 아이들이 학급별로 돌아가며 점심 급식을 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자기들이 먹은 식판 정도는 자신들이 씻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망치면 망치는 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배울 것이 있겠지요. 그 중 몇몇은 또 요리에서 자기의 재능과 나아갈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뭐, 이거야.. 반 농담삼아 하는 이야기고. 

 

(그나저나 혼자 생각에, 아침에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건강과 두뇌회전을 위해서라도, 간단하게라도 급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경기도였나 대전이었나.. 일부 학교들에서는 아침급식을 실시하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좋은 현상입니다.) 

 

조카들(두 집의 네 녀석 모두 사내애들)에게 (저는 미혼이고 사실 결혼생각도 없습니다.) 어릴 때 부터 가끔 김밥부터 시작해서 피자만들기를 같이 하거나, 이런 저런 요리를 해 주었더니 녀석들이 이젠 지들끼리 소스만 있으면 비빔냉면도 만들어 먹고, 엄마 없을 때 이런 저런 요리를 하겠다고 전화로 엄마에게 미주알 고주알 묻는 둥 한다더군요. 심지어 살짝 괴짜인 둘째 녀석은 엄마 없을 때 당장 파김치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냉장고에 쪽파가 없다고 엄마에게 대파로 만들면 안되겠냐고....... :- ) 

 

 

 

제가 왜 이런 생각(아이들에게 요리교육)을 하게 됐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저는 요리를 할 줄 알게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사춘기 이후 내내 따라 다니던, 바로 그,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이란 것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100% 제 주관적인 사견일 뿐이고, 딱히 요리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와 성숙..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적어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비록 레시피를 참조하면서 이지만, 어쨌든,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생긴 아주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 곳'을 떠나 '저 곳', 아니 '그 어떤 곳'에 가서도, 적어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은 거의 모두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 외국에 가서도 비슷한 재료들로 얼마든지 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반대로, 생각하며 둘러 보면, 밥 할줄도 모르고, 할 줄 알아도 습관이 안되서 마냥 귀찮다 어쩌다 하는 핑계로, 어머니나 밥 차려줄 누군가가 없을 때, 기껏 라면이나 주문메뉴로 끼니를 때우고, 심지어 라면 끓여 먹은 것조차 설겆이 못 하고, 안 하고, 개수대에 탑쌓기 놀이하며, 곰팡이가 피도록 지내는 사람들.. 특히 남자애들(애 어른 할 것 없이 그런 사람들 많죠)을 보면 한심한 것을 넘어서 '이런 상태'의 삶이 그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는 않으리라 확신하게 됩니다.

 

'그걸 왜 내가 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남이 차려주는 밥상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뭐.. 심한 말은 줄이고.. 그럼 너는 얼마나 요리를 잘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저도 뭐 딱히 프로패셔널하게 잘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요리를 정식이든 약식이든 어디서 배워 본 적은 없고, 그저 하나 둘 해보면서, 익히 깜냥일 뿐입니다. 철저히 사먹는 밥이 허전하고 지겨워서 익히기 시작한 생계, 생존형 요리라고나 할까요.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나물이의 요리책'을 보면서 하나 둘 해보기 시작했고, EBS에서 하는 요리프로를 그나마 볼 수 있을 때면(주말에 일주일치를 한 번에 연달아 보여주기도 하더군요) 눈 여겨 봤다는 것, 이런 저런 요리 프로나 맛집 소개 프로(오죽 많습니까)를 보면서 하나 둘 메모를 해 보고, 가독성 높은 요리책(나물이의 요리책은, 완성요리컷만 덜렁 있고 그야말로 요리를 글로 배웠어요 하는 수준의 설명글만 있던 기존 요리책과는 정말 차별화 되는 혁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을 몇 권 사본 것, 그리고 월마다 나오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요리잡지를 한 일 년 매달 사보다가 이후 정기구독도 일 년 하게 된.. 그 정도의 시간과 꾸준한 지속으로 얻어진 결과 정도 입니다. 

 

아직도 이름도 낯선 서양 요리나,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본격 요리는 잘 엄두도 안날 뿐더러(하고 나면 진이 빠지거든요. 들인 공만큼의 만족도도 그냥 그렇고..), 워낙에 기본적인 우리 반찬들을 좋아하는 지라 딱 제가 먹고 싶은 가정식 요리들만 주로 하는 편입니다. 

 

간단한 밑반찬들과 겉절이류들, 나물무침, 생선조림, 다양한 닭요리들(닭가슴살텐더부터 시작해 삼계탕, 찜닭, 동대문식 닭한마리까지)과 고기류(사실 불판에 생고기 굽는 거야 뭐 요리라긴.. 직접 양념 재워서 하는 정도는 되어야겠죠. 불고기, 떡갈비류와 만두나 완자, 미트볼, 꼬치구이 등등). 튀김과 전들. 이상하게 어머니들이 좋아하는 잡채. 이 정도면 뭐 대충 다른 요리들까지 해 볼 엄두가 나더군요. 이를 테면 곤드레나물 직접 사다가 강원도에서 먹었던 곤드레밥을 해 봤더니 제법!..  온 가족이 강원도 안가고 한 솥을 슥삭. 

 

물론 남에게 돈 받고 팔 정도는 당연 아니고 그저 한가한 휴일에 식구들이 모였는데 뭔가 별식은 생각나지만 딱히 온가족 외식까지는 번거롭다 싶을 때... 이런 저런 요리를 해서 즐기는 정도.  

 

깊고 넓은 요리의 세계에 대해 그저 기본 밥상 정도 차릴 줄 아는 실력으로 무슨 요리 요리 하고 있느냐 하실수도 있겠지만 

 

그런데 그렇게 하나 둘 나물 무쳐보고, 이런 저런 국 끓여 보고, 겉절이도 해 보고 하는 사이 이제는 재료만 있으면 이건 어떤 조리법이 어울리겠고, 어떤 양념들을 쓰면 되겠구나 감이 잡히더군요. (물론 생전 처음 해 보는 요리나, 자세한 양념비율이나 필수 부재료들은 레시피를 찾아 보고 참고합니다.) 

 

시금치 하나만 놓고도 데치고 물기 짜서 소금이나 간장, 마늘, 참기름 정도로 담백하게 무치는 기본적 무침과 

고추장, 설탕 조금 넣어서 매콤달콤하게 무치는 법. 기름에 살짝 볶아 먹어도 좋고, 샐러드 소스에 생으로 먹어도 좋다는 정도. 

 

제철의 섬초나 포항초는 맛이 더 좋으며, 

시금치를 부재료로 쓸 때는 주요리의 성격에 따라 뿌리채 잘라내 낱장으로 조리 하는 것과, 뿌리 부근의 영양소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뿌리를 열십자로 자르고 흙만 깨끗이 씻어내 뿌리 부분을 살려 요리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는 정도.

 

칼도 이것 저것 써보니 마트에서 파는 모양 좋고 칼라풀한 칼들 보다도, 도루코니 헨켈이니 하는 유명 브랜드보다도.. 어머니들이 왜 묵직한 칼을 선호하는지도 알겠더군요. 기타 이어지는 이런 저런 조리도구들과 그릇들의 세계... 네.. 저는 어느 새 마트에서 자동차용품 코너나 스포츠용품 코너 보다는 주방용품 코너에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ㅠ.ㅠ 

 

뭐.. 이런 이야기들은 그저 모두 재미삼아 하는 이야기구요.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요리를 하게 되면서, 그리고 할 줄 알게 되면서 정말로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없어졌고, 심하게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입니다. 에라 맛있는 거나 해먹자. 하고 씩씩하게 장 봐와서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음악 틀어 놓고 이런 저런 요리 하다보면... 현실의 삶이 던져 놓는 짙은 그림자 따위, 스멀스멀 도망치더라구요. 

 

그렇게 생각하고 둘러보면 주위에 짜증이 심하고 웃을 줄 모르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요리를 할 줄 모르거나 즐기지 않는 사람들인 것 같더군요. 

 

또, 혼자 생각해 보건데, 오래된 맛집의 할머니나 주인아주머니들 보면, 피곤할 텐데도 피곤한 줄 모르고 여유있게 손님을 대하고(인정이라고 하지만), 하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요. 그 바탕은 일종의 '자신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맛집이니 대박이 났을 거고 돈을 충분히 벌었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 하실 수도 있지만 제 생각에는 그 이전에 손맛이든, 자신만의 비법이든, 어쨌든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나눌 줄' 아는 사람의 즐거움과 여유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아내나 어머니가 집이라도 비우면 한숨 쉬며 라면물부터 올리거나, 냉장고의 차가운 반찬들 대충 꺼내 놓고..  뎁혀 먹을줄도 모르고.. 더 나아가 냉장고 속의 반찬통들이 제 손으로 문열고 나와 식탁에 삼렬종대로 모여주길 바란다는... 남자들. 뭐.. 그래도 그게 좋다면 어쩔 수 없는거고, 적어도 아이들에게는 그런 한심함을 물려주지 않았으면.. 더 나아가 그 아이들도 느끼게 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으시다면.... 

 

 

저는, 요리를 할 줄 알게 만들라고. 말 하고 싶었습니다. 이상~  

 

쓸데없이 길어진 사담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사족 - 제 MSG는 다른 의미입니다. MSG는 사지도 드시지도 사용하지도 마세요;  뭐 저도 가끔 라면 즐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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