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과 십팔대대선(수정)

2012.12.29 20:46

ML 조회 수:1694

레미제라블과 십팔대대선

소설이든 뮤지컬이든 그것을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각 매체와 그 매체간의 차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원작의 영화적인 가능성은 최대한 취하고,아쉽지만 버려야 할 요소들은 과감히 쳐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하죠.영화〈레미제라블〉에 대한 평론가들의 관심도 거기에 있었습니다.원작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했나.잘 버리고 잘 취하여,원작을 넘어서는 영화만의 그 무엇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레미제라블〉은 이야기의 유기성을 버리고,소설 원작이나 무대 예술에선 볼 수 없는 배우들의 ‘표정 연기’를 취한 작품입니다.영화는 화면 가득 배우의 표정을 보여주고,이야기는 얼른 얼른 처리한 후 그 다음 얼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진행의 자연스러움이나 유기성 같은 건 뒷전이에요.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두 시간짜리 예고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요?소설이든,영화든 이야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포기하는 건 말이 안되지 않느냐고요?네.맞습니다.말 안돼죠.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영화 〈레미제라블〉의 코제트와 마리우스를 좀 보세요.그들은 만나고,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고,사랑에 빠지자마자 영원을 약속하고,후에 재회하자마자 결혼식을 올립니다.중간 과정 같은 건 전혀 없어요.물론 현실속에서도 만남에서 결혼까지 일사천리인 이들이 있기는 하죠.그러나 겉보기에 빠른 사랑일수록 내면은 더 복잡하게 마련입니다.영화는 거기에 대해서는 설명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그저 처음 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코제트의 표정,떠나간 코제트를 그리워하는 마리우스의 표정에만 주목할 뿐입니다.

 

라마르크*(수정했습니다)장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기를 올리는 시민군의 모습은 어떤가요.그가 죽었단다!라는 대사와 ‘시민군이여 사기를 드높이자’하는 노래 가사가 그냥 붙어서 나옵니다.적어도 시민군들의 가슴 한켠에 그들의 지도자로 자리잡은 자라면,반응도 다양해야 맞죠.슬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분노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혁명을 포기할까 하는 이들도 나오는 게 자연스럽습니다.그리고 이렇게 흩어지고 복잡해진 집단의 감정이‘가서 싸우자’라고 하는 사기 진작으로 이어질만한 감동적인 계기나 연설도 하나쯤 있어야 이야기가 매끈하지요.소설엔 그런 장면이 있지만,영화판 〈레미제라블〉엔 그런 과정들이 모조리 생략돼있습니다.

 

이처럼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다 자판기 같아요.당연한 일에 당연한 감정만 느낍니다.심지어 장 발장에게 ‘용서’받은 자베르가 자살을 하는 장면에서조차 그러더군요.그 장면이 어떤 장면입니까?자신이 평생 ‘범죄자’취급한 장 발장이 자신을 ‘용서’한 데서 나오는 도덕적 열등감,도대체 그 용서가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이해해내는 데 끝내 실패한 데서 비롯되는 혼란,옳다고 믿고 평생을 살아온 가치가 흔들리면서 생긴 중년 남성의 무기력감 같은 대단히 어렵고 복합적인 감정이 마구 뒤섞인 장면 아닙니까.영화판 〈레미제라블〉속 자베르는,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을 모조리 대사로 처리한 뒤 다리에서 뛰어 내립니다.복잡한 내면을 그토록 명료한 문장으로 잘 정리해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그 상황에서 죽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영화는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을 구축하는 데 분명 실패했지만,그 실패가 의도적이라는 겁니다.팡틴이 머리카락을 잘린 후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하는 영화의 초반부를 지나면,관객들은 이 영화의 지향점이 어딘지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네,〈레미제라블〉은 애초에 ‘장 발장 이야기’를 ‘알려주는’영화가 아닙니다.장 발장 이야기는 춘향전이나 놀부전처럼 관객들도 이미 백 번 천 번은 들어서 다 알 것으로 가정을 하고 시작하는 영화에요.이야기가 튀고 인물들이 죄다 자판기처럼 행동하는 것도 그때문이죠.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 얘기도 알고,자베르의 최후도 알고,라마르크의 사망에 사기를 드높이는 시민군의 이야기도 이미 안다는 전제 하에 움직이는 영화인거죠.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전후 맥락 만들자며 시간을 지체하는 대신 ‘영화에서만 가능한 무엇’을 얼른 얼른 보여주자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인 겁니다.말하자면,대단히 ‘경제적인’영화인 겁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극 영화의 기본 요소마저 버려가면서 보여주려 했던 ‘영화만의 그 무엇’이란 게 도대체 뭐냐.바로 ‘표정’입니다.네,〈레미제라블〉의 소설 원작엔 ‘음악’이 없고,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선 배우들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가 없죠.‘노래하는 주인공들의 표정 연기’,이건 오로지 영화로만 가능한 체험입니다.빵 하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고된 노역을 하는 장 발장.우린 영화판 〈레미제라블〉을 보며 소설에서 느꼈던 그의 처참하고 남루한 내면을 천천히 음미하긴 어렵습니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확실히 볼 수가 있지요.코제트에 대한 사랑과 혁명 동지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마리우스의 내면은 어떻습니까.영화는 그가 가진 내면의 갈등에 공감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나 맥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대신 그의 표정을,무대 위에선 너무 멀었던 마리우스의 ‘노래하는 얼굴’을 보여줍니다.결국 영화 〈레미제라블〉의 평가는 취향에 따라 나뉠 수 밖에 없습니다.이야기의 유기성마저 뒷전으로 미룰 만큼 등장 인물의 ‘표정’에 집중한 작품이다보니 분명 강렬하긴 합니다.그러나 ‘자베르 경감의 내면을 그렇게 널뛰기하듯 띄엄띄엄 묘사한 것 만큼은 참을 수 없어!’라는 식의 관객 반응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죠.

 

전 영화의 지향점을 파악한 후부터는 편집이 튀네,인물들이 단편적이네 하는 생각을 접고 그냥 재미있게 봤습니다.장 발장 이야기는 어떤 매체로 옮겨도 붉고 강렬하더군요.지난 대통령 선거일에 개봉한 영화라 더 ‘세게’와닿은 면도 있습니다.아마 영화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라신 분들 계실겁니다.‘프랑스 혁명 후 시간이 흐른 뒤 왕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는 자막이 나오거든요.정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영화가 묘사하는 왕정 치하 노동자와 시민들의 고통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더군요.팡틴의 이야기는 특히 주목할 만 해요.다른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팡틴 역시 충분한 시간이나 맥락을 투자해 묘사되진 않습니다만,머리카락이 잘리고 이가 뽑히고 창녀가 된 후 쫓겨나 목숨을 잃는 그녀의 비극은 미처 손 쓰고 생각할 시간조차 없이 휘몰아치는 지금의 묘사 방법이 오히려 더 적절해보입니다.그녀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을 한꺼번에 다 담아내고 있습니다.해고가 두려워 상사의 성희롱을 참고,아이가 있음을 일터에 일부러 숨기고,절대적으로 인정돼야 할 신체의 권리마저 무참히 유린되지요.장 발장을 다시 만난 그녀의 대사를 보세요.‘법엔 자비가 없나요?’약자를 보호해야 할 법이 강자의 채찍으로 쓰이는 것,이미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조합 파괴를 목적으로 노조가 제기한 수백억 대 손배 소송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그리고 대선 직후 그 결과에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들 중 몇몇이 생각나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혹독한 시간들을 매번 극복하고 부를 일궈내는 장 발장의 생명력은 어떻습니까.장 발장이 가지고 다니는‘대단히 위험한 인물’이라 적힌 신분증은 ‘기회의 불평등’을 상징합니다.그것을 찢는 행위는 기회의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죠.이후 그는 나락으로 떨어지길 몇 차례 반복했으나 그 때마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다시금 일궈냈습니다.기회가 평등하고,과정이 공정하면,정의로운 결과는 알아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겁니다.지구 반대편 나라의 십구세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면이 대단히 많은 거지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역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은 대단히 의미있는 것이로구나.하고 말입니다.근현대사 교육을 시키겠다며 짙푸른 칠판에 백묵으로 한 바닥을 채운 후 외울 것을 강요하는 것보다,역사를 예술로 만드는 작업이 더 쓸모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최근 영화평론가 최광희씨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은 여러 갈래의 예술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려 애쓰지만,우리 가운데 누구는 광주조차 지우려 애쓴다’는 글로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근로시간 준수,권력형 성희롱 척결,고용 안정,보육,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법 집행 등이 그저 ‘아자 아자’수준의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비극적이었던 그 시절을 계속 상기하고 이 사회가 그 시절을 넘어 올바른 길로 걸어가고 있는지 자문해보는 과정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저는,영화에 묘사된 비참한 사람들(les miserables)을 ‘아,옛날 프랑스 사람들은 저랬구나’란 식으로 타자화하는 덴 실패했습니다.도리어 지금,여기,2012년 대한민국의 아픈 현실을 보는 것 같았죠.갈길이 멀다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하지만 동시에,서두를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레미제라블〉의 공화주의자들도 자신의 다음 세대에 가서야 제대로 된 공화정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하지요.그렇게 더디고,그렇게 고통스럽고,독재 잔존 세력들이 망령처럼 되살아나기도 해 가면서,세상은 그렇게 진보하는 겁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32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86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014
61466 어쩌면 우리는 형체가 없는 대상과 싸웠던 것 같습니다. [8] catcher 2012.12.29 3663
61465 듀9 이번 보신각 타종행사에 [2] 깨져있는 시민 2012.12.29 1536
61464 아버지와 대화 많이 하시나요? [9] 욘욘슨 2012.12.29 2024
61463 야권을 위한 나름의 조언 - 맹찬형 기자 [2] 마당 2012.12.29 1564
61462 성폭행 피해女 끝내 자살, '가해자와 결혼강요 [12] amenic 2012.12.29 6157
61461 뜬금없는 사상 - 하단선 연기에 대한 아쉬움 Rughfndi 2012.12.29 1173
61460 [바낭] 어제 위대한 탄생3 - 멘토 서바이벌 김태원편 잡담 [4] 로이배티 2012.12.29 3334
61459 인터넷 연애 상담 얼마나 믿으세요? / 여초 커뮤니티는 남자를 증오하는가 [33] 라뷔 2012.12.29 5742
61458 우유가루는 짠맛이 나는군요 [5] 가끔영화 2012.12.29 1832
61457 트윗봇 추천해 주세요 :) [4] 고래밥 2012.12.29 1694
61456 이곳에 어울리는 모임인지 모르겠지만 [10] 궁둥이 2012.12.29 2732
61455 [듀나인] 스마트폰 기본 어플 [6] 닥호 2012.12.29 1991
61454 스타더스트님의 선물-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고 [3] 쥬디 2012.12.29 2286
61453 오늘자 뉴스의 1보 사팍 2012.12.29 1646
61452 mbc 방송 연예 대상 [58] 감동 2012.12.29 3325
» 레미제라블과 십팔대대선(수정) [9] ML 2012.12.29 1694
61450 sbs 가요 대전 [50] 감동 2012.12.29 4165
61449 대세를 거스르며 레미제라블이 재미없었던 1인 [19] herbart 2012.12.29 3323
61448 고종석 트윗 [25] 호밀호두 2012.12.29 5055
61447 성시경&CL - 사랑하기 때문에 [8] 자본주의의돼지 2012.12.29 348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