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나? 전날 퍼마신 소맥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출근을 했던 날이었어요. 시작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된 야근 퍼레이드의 중반이었나. 밤 9시쯤, 도저히 앉아 있을 기력이 없어 뛰쳐 나와버렸어요. 그 와중에  바리바리 교정 원고 뭉치를 양 팔에 끼고. 기우뚱 기우뚱. 누런 종이 봉투가 찢어져 팔은 빠질 것 같고. '난 말야.만화가 지망생 유시진 작가님 원고 배달 중인거지.' 우울해질까봐 세뇌용으로 중얼중얼. 아마 그게 일곱번째 뽑은 교정지인가 그랬나 봐요. 한 귀퉁이엔 조판소에서써 보낸 글씨. '5교까지만 됩니다. 원래. 좀 심하네요'  나이도 많은 주제에 일도 못한다, 로 읽혀서 그 귀퉁이는 살짝 접어놨어요.

 

 

그럴 때 있잖아요.발에 닿는 바닥이 느껴지지 않을 때.아무리 눈을 비벼 보아도 앞이 또렷히 보이지 않을 때. 자야 될지, 씻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냥 멍한거죠. 눈물도 안 나와요. 그냥 멍하니까. 그런 채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죠. 세상이 그러니까. 미치게 바쁘니까요. 정신차릴 틈을 안 줘야 다들 적응하고 찍 소리 안 하잖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념에 멍하니 신촌 전철역에 내렸어요.

 

"안녕하세요 우리는 실용음악학원에 다니고 있고 대학을 갈려고  열심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좀 많이 떨리는데요. 박수 많이 많이 쳐 주세요"  한 소녀가 말해요. 뒤에는 보송보송 예쁘고 통통한 소녀들,  여드름이 뾰롱한 소년들, 부산 미용실 언니야 같이 봉긋하게 솟은 머리를 한 소녀 등등이 자기들끼리 까르륵 대고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해요. 나는 원고 봉투를 깔고 맨 뒤에 앉아요.

 

소개를 맡은 소녀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아 이쁘다. 낡은 회색 티에 짤막한 바지를 입고 나무색 기타를 척 메고,  멋있어 죽겠는데 태도는 어찌 저리 수줍은지.  그래도 애들 중 리더격인지 달달 떠는 애들을 뒤에서 안고 있어 주기도,  웃겨 주기도 하고 그래요. 몇몇 아이들이 노래해요. 되게  촌스러운 발음이지만 울림이 좋은 소녀도 있었고, 보는 내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떠는 소년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아까 그 소녀가 바닥에 찰팍 앉아 낯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요. 아, 저기 바닥 되게 더러울 텐데. 라는 걱정도 잠시.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해 주는 부드러운 형태의 위로 같았어요, 그 노래는.

 

내 핸드폰에 담긴 소녀의 영상은 힘들었던 그 직장을 결국 그만 두기 전까지 다섯 번 정도 리플레이되었어요.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데,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워도 안 되고 술을 퍼 마셔도 안 될 때. 가만히 꺼내 들었죠. 노래를 못하고 촌스럽기도 한 아이들 틈에서 잘난체 하지 않고 자유롭고 온화한 에너지를 뿜어내던, 작은 어머니같던 그 소녀를 떠올리면 왠지 든든해졌어요. 안 되는 부분을 백번 천번 반복하거나 기타줄에 피부가 베이거나 기획사 오디션에서 인형처럼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성형을 권유받거나 할 소녀를 상상하고 '힘내 너도'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면 너무 엉뚱한가요. 듀게 글을 읽어내리다가 슈퍼스타 k에 장재인이라는 사람을 소개하는 글에 심장이 쿵쾅. 혹시 걔인가. 근데 맞을 거 같았어요. '재인'처럼 생겼거든요. 맞네요 근데. 전보다 안 예뻐졌네. 둘둘 말아서 고무줄로 꽉 묶은 머리가 딱 어울렸었는데. 대학에 갔다고 파마를 했나보죠. 그래도 참 이쁘다.

 

듀게 어떤 분의 지산 락페 후기에서 '꿈같은 순간을 맛보기 위해 우리는 지리한 현실들을 묵묵히 걸어야 해요' 와 비슷한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요. 음반이며 영화 같은 반짝이는결과물을 내 놓은 나의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어요. 오늘도 하려고 한 열 가지 일 중 끝낸 건 겨우 한 개. 밥을 벌기 위한 일들을 하고 왔고 비가 와서 끈적였다는 핑계로. 지구 반대쪽에 있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립고 안타까운 순간들을 기다려 내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바라는 건 떡볶이를  해 먹고 설거지를 니가 하네 내가 하나 토닥거리는 그런 날들. 그런 평범함이 꿈이 되었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은. 전철역 바닥에 앉아 노래를 하던 예쁜 이름의 소녀가 브라운관에서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꿈의 시작이 파릇-하고 터지는 모습을 봤으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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