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 gibbons 님. 글이 워낙 잘 빠졌네요.  


http://www.ddanzi.com/blog/archives/117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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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가 다시 드라마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대부분 열혈교사가 등장할 것이란걸 짐작했을거다. 사실 이건 추측이라 할수도 없다. 문제아와 열혈교사없이 학교를 소재로 드라마를 찍을 수가 없자너.

열혈교사라면 GTO급의 어처구니없음으로 승부하거나 아니면 사극풍의 비장함을 뽐내는 그런 교사가 흔히 떠오르지 않나. 그런데 학교2013이 내세운 주인공은 정인재였다. 일진 학생이 자먹 한번 휘두르면 우주 저편으로 날라갈것같은 그리고 모든 반 아이들을 올려봐야하는 신장의 소유자.

그리고 시작된 드라마. 이건 여느 학교물과 달랐다. 선생이 주인공, 아니 주인공 정도가 아니라 한 기간제 여교사의 투쟁기가 주제야?? 아니 뭐 이런…

이런 쌈빡한 드라마가……

난 솔직히 요새 학교 모른다. 최근 들어서 안게 아니다. 군 휴학하고 잠깐 공백기에 학원서 알바를 하면서 겪은거다. 정말 그새 많이 변했더라. 그때로부터 또 세월이 흘렀으니 지금 <학교 2013>이 그리는 상황이 실제 현실과 어느정도 싱크로율이 맞아떨어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그건 드라마를 보는거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본 이 드라마는 정인재란 한 현대판 충신을 집중조명하는 인간극장이다. 엥?? 충신??

그래. 정인재야말로 역사가 얘기하는 충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참 많이 닮았다.

정인재는 교장과도 반의 학생들하고도 학부모하고도 동료교사와도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정작 정인재는 교장, 학생, 학부모, 동료교사 그 누구와도 대립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정녕 맞서야할 적수는 이들이 아니잖어. 오히려 그 적수와 맞짱을 뜨려면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도 동료교사도 심지어 교장도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채 내내 갈등을 빚고 그 부담을 고스란히 다 감수한다.

그 적수를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지만 오늘 방영분에 나온 대사를 빌려 '망가진 세상과 시스템'이라고 치자.

원래 충신이 맞서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너, 너… 그리고 너' 이렇게 딱 집어 정할 수가 없다. 물론 지금 내가 말하는 충의 개념은 정몽주처럼 어떤 왕조에 충성한다거나 장세동의 전두환에 대한 충성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그런 충은 의외로 쉽게 할 수 있다. 오늘도 그런 부류의 충은 넘쳐난다. 취직을 하면 회사에 뼈를 묻겠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며 대기업 직원이 되면 사주와 그의 가문 전체에 충을 다해야하지 않나.

충신이 배척받을 때가 바로 이런 부류의 충이 넘쳐날 때다. 군주가 충신을 배척하는 장면을 역사책에서 볼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 왕 참 멍청하네. 그러는가. 그러지마라. 왕이 멍청해서 충신을 배척하는게 아니다. 주위에 충이 넘쳐흘러 굳이 그런 쓰잘데기없는 충성까진 필요없다 판단해서 버리는거다.

보라. 정인재의 충은 쓸모가 없다. 교장은 정인재말고도 얼마든지 학교에 충실할 다른 기간제 교사를 언제든 뽑을 수 있다. 구태여 정인재때문에 속썩이고 골치아파할 이유가 없다. 그의 눈에 보이는 객관적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잖어.

뭐 정인재 역시 교장 개인에게 하는 충성이 아니기에 그에 관해선 덤덤한 편이다. 그렇다면 정인재는 누구에게 충성 했던걸까. 그는 누구를 위해 그 불편함을 감수한걸까. 그의 대사를 빌리자면 학생이다.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교사는 쓸모없는 것 아니냐"는 대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오늘 방영분에서 2반 학생들이 보인 태도가 봉건왕조의 국왕들이 충신을 내칠때 쓰는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국왕이 충신을 내칠때는 그가 충신이 아니라서 내치는게 아니다. 충신이란걸 알고 내치는거다. 2반 학생들도 정인재가 담임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충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면 꼼짝없이 걸리는거다. 그의 충은 진정인가 가식인가. 2반 학생들은 오정태를 데려온 정인재의 충은 가식이라고 결론지었다.

학생들은 충에 배고픈게 아니다. 사실 학생들도 자신을 위한다는 충을 언제든지 볼 수 있고 그런 작자들(?)을 적잖게 봐왔다. 역대 왕조의 국왕들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정말 충에 목말랐다면 그게 가식이라도 붙잡고 싶어해야 하는거 아니겠나.

어디 학생들만 충이 넘쳐나나. 카드사는 '여러분~ 부자 되세요~'하고 광고하고 전화만 걸거나 받아도 '사랑합니다 고갱님~'하는 곳이 널렸다. 정치인들도 서로 자신이 충신이라 우기고 다니며 대기업 총수들은 애국자 중의 애국자다. 지금 세상은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충이 산사태처럼 흘러넘치는 신기하기 짝이없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정인재의 충은 얼마나 무능력하고 찌질해보이고 비루해 보이고 자기만족적인 가식투성이로 보이겠나.

그는 자기만족적인 충을 하고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바라지않는 충을 혼자 잘난 맛에 들떠서 충신 짓거리한다고 바쁘지 않나.

그의 충은 얼마나 비루한가. 아~ 기간제 교사의 충성이라니 뭐가 뛰면 뭐가 뛴다더니. 확 짤라뿔라.

그의 충은 왜 이리 찌질한가. 정인재는 내내 망설이고 주저한다. 정작 오정태를 데려가려 그의 집앞에서 마냥 뻗치고 기다리면서도 "왔으면하는 마음 반, 안왔으면하는 마음 반"이란다. 이게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주문하면 되는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냔 말이다. 그렇게 죽자고 수능형 강의에 반대하면서 그렇다고 자신의 강의에 대한 확신도 없다.

결정적으로 그의 충은 무능하다. 정작 그가 맞서야할 그 '망가진 세상과 시스템'엔 손조차 못댄다. 한마디로 변죽만 울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정인재는 세상에 찾기힘든 충신이다. 충이 열렬히 생산되고 빠르게 소비되는 이 사회에서 찾기 힘든 충신이며 역사는 누누히 이런 충신이 나오면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지켜야 한다고 틈만 나면 조언한다. 왜?

정인재 본인이 이 상황에 가장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문제가 뭔지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무능력하고 찌질하고 비루하고 쓸데없기까지 한 충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그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충을 포기하지 못한다. 차라리 이 세상에서 퇴출되면 퇴출됐지 자신의 충을 누구든 쉽게 소비하고 쓸 수 있는 편리한 충으로 고치질 못한다.

드라마를 통해 상황전개를 전지적으로 꿰뚫고 있는 우리는 안다. 유능한 강사보단 이 무능한 기간제 교사야말로 우리 교실에 필요한 사람임을. 저런 교사를 한 학교에 학년당 1명씩만 배치할 수 있어도 OECD 학생 행복도 지수에서 압도적 꼴찌로 국격을 높이는 일따윈 일어나지 않겠지.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충은 넘쳐흐를 정도로 생산될 수 없고 그런 사회는 이제껏 출현한 적도 없다. 아니 그런 충의 진가를 알아보며 "난 너처럼 되고 싶었어"같은 폭풍드립을 날려주는 사람부터 찾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아예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분명 사회는 그런 사람을 생산해내고 있다. 많이 망가졌어도 그래서 생산되는 사람 수가 줄어들었어도 꾸준히 꼭 필요한 사람들은 늘 나온다. 그런 충신들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이 드라마의 작품성이나 현실성 혹은 배우의 연기력을 따지기보단 아마 주인공에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리라 본다.

그리고 요새 많은 허탈감을 느끼고 있을것 같다. 단지 이번 대선결과 때문이 아니다. 누가 지고 이기고의 문제를 떠나 가치가 부정된 것 아닌가하는 5년 뒤라고 회복되리라 보장할 수 없는 무형의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절대 패배한 문재인 후보를 선택한 48% 전체를 가리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당근빠따 이런 부류의 충신은 48%씩이나 나오지 않는다. 더군더나 민주당도 친노도 아니고 문재인이나 안철수도 아니다. 우리나라 정치판은 그런 충신을 대통령 후보로 만들거나 집단세를 꾸릴 수 있는 환경이 못된다. 다만 이력서 한번 작성해본 경험도 없는 공주님과 그 주위의 환관들이 하도 설치고 돌아다니니 걱정이 안될 수가 없잖어, 안그래도 얼마없는 사람들인데 다 꼭꼭 숨어버리면 어쩌냐.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며 몇마디 변론을 하고자 한다.

이런 가치있는 충은 무능력하고 비루하고 찌질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원래 그런 성격인거다. 만약 이런 충이 유능하다면 세상은 이미 천년전에 전설의 천년왕국쯤은 건설했을거다. 역사를 돌아보면 내내 극소수였고 거의모든 상대에게 공통적으로 무능력하다 비난받았으며 실제 성공률도 낮았다. 성공을 했어도 완벽한 성공이란 손에 꼽아볼 정도이고 대게는 숙제를 남긴 찝찝한 성공을 거뒀다.

내일을 섣불리 장담할 수 없으니 찌질할 수밖에 없다. 이 충신의 부류들 중 자기대에서 성공을 맛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냉정히 확률적으로 봤을때 당신도 자기대에 성공을 못볼 수 있다고 여겨야 한다. 그럼 내가 충신인지 한낱 쓸데없는 몽상가인지는 어떻게 아냐고? 그것도 증명할 길이 없다. 다만 우리의 삶을 드라마처럼 꿰뚫어 볼 수 있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증명해 주겠지. 그러니 충신의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다.

정신승리도 하루이틀이지 그걸 변론이라고 하냐고? 어쩌겠나. 난 그런 사람이 아닌걸. 미안하게 됐다.

……

미안합니다. 정인재씨. 설령 당신을 현실에서 본대도 난 강세찬처럼 멋지게 당신을 잡아줄거라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얄입게 생각하겠지만 믿겠습니다. 이런 충이야말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겁니다. 짐승들도 자기 집단의 리더에 충성한다거나 집단의 생존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충은 오직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이재오나 김지하처럼 변절도 못한답니다. 차라리 부러지거나 세상에서 숨어버리죠.

그래서 믿습니다. 그래서 거듭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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