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쯤에 동남아 여행을 갈 일이 있어서 틈틈이 관련 서적을 읽고 있어요. 좀 전까지는 마하티르 자서전(『마하티르 - 수상이 된 외과의사』)을 주말을 반납해서 겨우 완독했죠. 그러고 나니 마하티르의 라이벌 격인 리콴유에 흥미가 생겨 책을 찾아봤는데, 자서전은 너무 길어서 스킵하고 살림지식총서에서 나온 『리콴유 - 작지만 강한 싱가포르 건설을 위해』를 e북으로 사서 후딱 읽었어요.


근데.. 뭐랄까, 다른 살림지식총서는 얇기는 해도 어느 정도 얻어가는 게 있어서 이번에도 별 의심없이 산 건데, 이 책은 저한테는 그냥 지뢰;;더라구요. 처음부터 끝까지 리콴유 찬양, 찬양, 찬양. 리콴유에게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는 싱가포르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 아니면 리콴유라는 제갈공명에게 휘둘리는 히어로의 이미지 메이커 정도로 그리고 있고, 리콴유의 정책은 무엇이든 별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법이 없이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보죠.


〔또한 각종 범죄에 대해 엄벌 정책을 시행해 철통 같은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싱가포르의 경쟁력이다. - 「공무원의 기본 정신은 비즈니스 마인드」중에서〕

〔싱가포르 경제의 빨간불이었던 노조 운동을 완전히 와해시킨 것도 마찬가지이다. - 「공무원의 기본 정신은 비즈니스 마인드」중에서〕

〔심지어 2004년에 리콴유의 아들 리센룽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도 싱가포르 국민들은 능력주의 검증 구조에 대해 무한히 신뢰했다. 리콴유의 아들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로 봐서 충분히 총리가 될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 「에필로그」중에서〕


이 정도만 봐도 숨이 탁 막히는데, 정말 압권은 따로 있어요. 바로 이거.


〔리콴유는 1983년 8월 14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대졸 남성들이여, 자신보다 우수한 아이를 원한다면 자신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아내를 고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중략) 리콴유는 (…중략) "인격 형성의 80%는 타고나는 것이며 단지 20%만이 교육의 결과"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유전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낳아야 하며 그 다음에 잘 교육해야 제대로 된 엘리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리콴유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졸 남녀 간의 교제를 성사시키는 국가기구까지 만들었다. (…중략) 그뿐만이 아니다. 대졸 여성이 세 자녀를 낳았다면 이들은 모두 일류 학교 진학권을 부여받았다. - 「인재 양성에 국운을 걸다」중에서〕


거기다가 사실관계까지 군데군데 이상해요. 예를 들어 볼게요.


〔이들을 중국에서는 하카(客家)라고 부른다고 한다. 말 그대로 집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뜻이니 이주민이란 뜻이다. - 「광둥에서 온 하카」중에서〕

책에서 뽑은 한 구절인데, 리콴유의 가계가 하카(객가)계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구절만 놓고 보면 하카인을 '동남아에 일하러 이주한 중국계 이민자 집단' 정도로 오해하기 쉬운데, 하카인은 그냥 중국 본토에서 하카어를 쓰는 한 민계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죠.



생각해 보니 이 책 말고도 제가 지금까지 한국어로 읽은 싱가포르 관련 책들은 대체로 싱가포르의 경찰국가 시스템에 호의적인 게 많더라구요. 리콴유를 최후까지 성공한 박정희 정도의 인물상에 겹쳐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건지.. 저라면 저런 데선 돈이 아무리 많이 벌려도 그냥 탈출하고 싶어질 거 같은데 말이죠.


마하티르 자서전을 읽고 나서 읽으니 비교가 되어서 오히려 마하티르에 대한 인상이 상대적으로 급 좋아졌네요. 마하티르도 상당히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지만 리콴유는 정말 마하티르하곤 그 끕이 비교가 안 되는 거 같아요;; 최소한 마하티르는 자기를 '국민을 돌봐주는 유모'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마하티르가 개인적으로는 교육에서의 체벌을 반대한다는 점도 생각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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