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옥, 타인의 지옥, 엑스트라 26

2013.01.27 00:56

知泉 조회 수:2289

1. 지나보면 제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 말은 "인간은 자신의 지옥에 살며 타인의 지옥을 부러워한다" 였습니다.

 내 지옥이 끔찍했던 만큼 타인의 지옥이 부러웠습니다. 탐욕스럽게. 그악스럽게 바랬습니다. 그 잉여의 지옥에서 살고 싶었어요. 유능한 인간의 소외,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허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천재의 외로움, 상대의 애정이 부담스러운 회피, 시기와 질투로 인한 고통, 기타등등기타등등. 누구나 자기가 주인공인 삶을 산다지만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잘해봐야 웃기는 감초거나, 스쳐가는 엑스트라 26번이었죠. 그런 엑스트라 26번의 삶이 부러웠던 이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엑스트라 26번이 언제나 싫었어요. 지금도 싫어요. 현실을 머리로 정리하고 이해하고 납득하고 마음을 움직여도 저 밑바닥의 끈적한 검댕은 그렇습니다. 타인이 부러워하는 삶에 대한 욕망은 들러붙어서 사라지지 않고 부끄러운 기억을 만들어줍니다. 질리지도 않고.

2. 사실 저도 진지하고 음울하고 매력적인 글을 쓰고 싶은데, 한 십분쯤 지나면 헛소리를 하고 싶어집니다. 무거운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보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차라리 웃기라도 하고 싶어서요. 웃을 힘조차 없다면, 유머가 떠오르지 않다면 그것이야 말로 끝이죠. 온힘을 다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지금의 우울함에서 도피합니다. 타조가 머리만 숨기고 도망치듯 회피합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요.

3. 나이먹어서 배운 것은 적당한 이기심과 뻔뻔함이 자신의 구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맞추면 그런 어색한 제 모습을 보고 상대가 불편해 하고, 맞추고 있는 나도 불편합니다. 내가 세상에 맞추지 않으면 상대는 불편하지만 나는 편합니다. 한쪽이라도 편해야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뻔뻔함이 힘이 됩니다. 아마 세상의 많은 뻔뻔한 이들이 잘 사는 이유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죠.

4. 그래도 일상의 즐거움은 엑스트라 26의 구원이자 전부입니다. 중고서적에서 하닥거리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마음맞는 소수의 사람들과 수다를 떨고 새로나온 랑콤의 한정판 블러셔의 색은 사랑스럽고 차가운 겨울 밤의 하늘은 아름답습니다.

 5. 언제나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쓸모없는 엑스트라 26은 편집될테니까요. 쓸모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애정을 보내며 쓸모없는 인생이라도 괜찮기를 바랍니다. 별과 별처럼 떨어져 있는 적막의 아름다움으로 홀로 있는 서글픔을 잊었듯 언젠가 세상이 쓸모없는 것에 대한 애정이 가득 차 온기가 스며들지도 모르니까요.

6. 별처럼 멀어도 좋은 꿈 꾸세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7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43
59595 [단편] 발렌타인 데이의 악몽 [5] clancy 2013.01.26 1453
59594 가족 대신 입덧하기도 하나요? [7] DKNI 2013.01.26 5185
59593 마마 볼까요 잭리처 볼까요 [13] 호롤롤롤 2013.01.26 1649
59592 예능프로를 10시대에, 드라마를 11시대에 하면 안될까요? [1] 눈의여왕남친 2013.01.26 1571
59591 [바낭] 의심 [9] 에아렌딜 2013.01.26 1930
59590 설정발설) 잭 리처를 봤는데,, [2] 텔레만 2013.01.26 1587
59589 이건 퀴어가 아니라 야오이 얘기 같은데(......) [16] 유우쨔응 2013.01.26 5008
59588 [바낭] 아이돌도 아닌 아이돌 작곡가 잡담 - 2012 다작왕 스윗튠과 아이돌들 [10] 로이배티 2013.01.26 3356
59587 그것이 알고싶다..... [9] 유은실 2013.01.27 4429
59586 [질문] 더 임파서블... 장면해석과 관련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스포주의) [9] 버섬꽃 2013.01.27 1447
» 나의 지옥, 타인의 지옥, 엑스트라 26 [13] 知泉 2013.01.27 2289
59584 술 취해서 길에서 자고 있는 사람 깨우고 왔네요 [20] 와구미 2013.01.27 7394
59583 sm 플레이어(웹툰) [5] 오명가명 2013.01.27 3263
59582 7번방의 선물 류승룡 바보 연기 통했네요. 4일 만에 100만명이 보다니 [12] 감자쥬스 2013.01.27 5051
59581 [윈앰방송] 클래식 ZORN 2013.01.27 776
59580 이런저런.. [2] 시민1 2013.01.27 1184
59579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김정호, 박애리 현준 둘이 부부로군요 [1] 가끔영화 2013.01.27 2090
59578 요즘 젊은것들은, 하고 흔히들 말하지만 [3] loving_rabbit 2013.01.27 2894
59577 역시 류승완감독이 베를린 일부러 역으로 갔군요. [7] 자본주의의돼지 2013.01.27 6253
59576 두드림 이인화 [7] 가끔영화 2013.01.27 315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