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거쳐, 9년 만에 비포 미드나잇이 나온다는 이야기에 심장이 덜컹거렸어요.

 

사실 나는 비포선셋의 팬이었답니다. 시리즈 첫 편의 풋풋한 감성은 싫진 않았지만 그냥 좀 시시했어요. 

비포 선셋을 보게 된 건 포스터 때문이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해질녁의 탈 듯한 붉은 색을 뒤로하고 

제시가  반은 눈물에 젖어 'I know'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만 울어버렸고 그때부터 시리즈의 팬이 되었어요.  




-밤이 되기 전까지는 모든 게 가능해요.

이 말은 비포 선셋의 프랑스어 판의 제목이기도 해요. Avant la nuit tout est possible...

파리에서 살 때 이런 경험을 두 번 겪었는데, 한 번은 헤어진 옛 남자친구였고 두 번째는 소위 말하는 썸남이랄까.

어쨌든.

첫번째 남자는 회사 출장으로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헤어지고 나서도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던 사이였기에 만나기로 했어요.

일과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까지, 딱 반나절 동안의 자유시간이 있다더군요. 

추운 날씨 탓에 더 차가운 느낌의  파리 북역, 한 체인 호텔의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면서 꽤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나 나나 서로의 첫애인이었고(둘다 첫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는 꽤 오랜 청년 백수였는데. 회사원이 되어

먼 곳으로 날아온다고 하니까.  

짧은 시간 동안 뭘해야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있는데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그가 걸어왔어요.

-얼마만이야, 잘지내고 있었어?

묘하게 튀게 들리는 한국말...그는 너무 반갑게 다가와 손을 잡았고, 내게 매우 친절하게 굴었어요. 

사귀는 동안 정말 무뚝뚝한 성격이었는데. 회사에 들어가니까 사교적으로 변한건지,  아니면 낯선 환경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어쨌든 감정 표현이 별로 없었던 그가 줄곧 '이 모든 게 믿겨지지 않는다'라고 연신 들뜬 사람처럼 말하더군요. 

좋지도, 그닥 싫지도 않고 이해가 갔어요. 가정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그는 사귀는 도중에도 

내가 외국을 한번 쯤 나가볼 수 있을까. 라고 이뤄지지 않을 꿈처럼 얘기하곤 했으니까. 

내가 파리로 가게 되면서 우리 사이는 끝났고, 나보고 떠나라고 한 것도 그였어요.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몇 권의 책을 보내주곤 했는데, 덕분에 내가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하고 마루야마 겐지를 싫어하는 취향이란 걸 알게 됐죠. 

 


나는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의무감으로 그를 자유의 다리로,오페라 거리로, 불이 꺼진 루브르 박물관의 정원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밥먹었느나며 내 끼니를 챙기더군요. 모든게 서툴고 투박했던 그에게 밥 때를 챙기는 게 유일한 애정 표현이었단 걸, 예전엔 왜 몰랐을까. 

여튼 웃음이 났어요. 그래, 그래, 밥먹자.

우리는 루브르 뒷 편에 위치한  Cafe Ruc에서 펜네를 주문했어요. 그는 이미 밥을 먹었다며 커피를 마셨고요.

블랙을 못 마시는 전형적인 한국 아저씨인 그를 위해 우유가 듬뿍 든 카페크렘을 주문해줬고, 설탕도 잔뜩 넣어줬어요. 펜네를 보고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때까진 스파게티 밖에 못봤다면서. 그냥 좀 슬펐어요. 

거긴 지금은 모르겠지만, 모델같이 예쁘고 스타일리시한 언니들과 남자들이 서빙을 해서 다소 주눅이 드는 카페였는데, 출장온 것이 분명한 버버리 코트를 입고 

서류 가방을 든 남자와 몇달 간 미용실을 못간 머리의, 유학생 티가 팍팍나는 여자가 그들에게는 좀 웃겨 보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늦은 밥을 먹고 거리로 나오니, 그와 내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한 시간 여 남았더군요. 

좀 걸을까 하는 와중 저 멀리서 보이는 에펠탑...

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고 운좋게 서있는 택시에 올라탔죠. 에펠탑으로 가주세요, 지금 빨리!

-그래도 파리에 왔는데, 에펠탑은 보고 가야지.

-너랑 같이 에펠탑이라니, 우리가 이럴 줄 정말 몰랐어. 지금도 믿겨지지 않아.

평소에 시간강박이 있었던 그를 달빛이 무장해제 시켰는지, 그는 너무나 느긋한 소리만 하고 있는 거예요. 급한 건 나 뿐이었고.

묻고싶었어요. 믿기지 않는 건 뭐야...? 에펠탑이, 아니면 우리?... 

하지만 묻지 않은 걸 지금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대신 나는 환상을 유지시켜줄 어떤 말들만 주절 주절 뱉어내고 있더군요.

-이게 한 시간에 한번인가,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 반짝 쇼를 하는데 그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 그때 보면 좋은 데.

낮에 왔으면 몽마르트에 올라가거나 오르셰 미술관 테라스에서 내다보는 전경도 좋은데...아쉽다.

-아...저거봐, 저거야?

택시가 세느강의 반쯤을 건너간 그 때, 에펠탑은 반짝반짝 쇼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야말로 비현실적인 환상적인 빛을 발하면서.

-응. 맞아. 예쁘지. 

-와. 정말 예쁘다. 

-....

-죽기 전에 이 풍경이 생각날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요. 그에게 지금의 기억이란 살다가 문득 떠오를 어떤 풍경일 순 있겠지만, 

그게 죽기 전 마지막은 아닐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까. 

그는 어느새 내 손을 잡고있었고, 에펠탑의 조명쇼가 계속 되는 내내 놓지 않았어요. 

택시에서 내려 그 빛이 사라질때까지 아무 말 없이 바라본 후, 나는 슬그머니 내 손을 빼냈어요.

아니 그가 놓은 거라고 해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다시 어색한 공기가 조금씩 우리를 감싸고, 그렇게. 



헤어지면서 그는 내게 건강해야한다고 열 번도 넘게 말했어요. 그건 그의 드문 애정표현 습관 중 하나였죠.

나는 다시 그를 택시로 호텔에 태워 보내며, 아랍인 택시 기사에게 잘 데려다 줄 것과 회사에 비용처리를 위한 영수증을 꼭 줄 것을 연신 당부하고 집으로 오는 지하철을 탔어요.

지하철 안에서 혼자 엉엉 울까봐 걱정을 했는데, 의외로 담담하더라구요. 

집에 돌아와선 평소엔 잘 틀지도 않는 TV의 볼륨을 잔뜩 올려놨는데, 사투리개그를 하고 있었어요. 

사실 잘 알아듣지 못하고 약간 눈치 챈 정도였는데 오버해서 막 웃었어요. 

그러다가 허기가 느껴져 컵라면을 끓여 국물까지 남김없이 마시고 잠들었고, 다음 날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그가 공항에서 건 전화를 받지 못했구요.

자동 메세지에 녹음된 그의 음성을 몇 번 반복해듣다가 문득 거울을 보니까 얼굴이 너무 부어있어서, 그때서야 좀 눈물이 났어요.



그게 10년 전의 일이고, 간간히 일년에 한 번 정도 안부 전화가 왔었는데 

그가 4년 전인가 결혼을 하면서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마지막 대화를 나눴어요.

이해하고, 아쉽지는 않아요. 가정을 이루고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니니까.

지금도 다시 보고싶단 마음은 없고, 근데 그냥 궁금은 해요.

가끔씩은 에펠탑의 불빛이 떠오르는지. 살면서 몇 번이나 생각나던지. 




Let me sing a waltz,

네게 왈츠를 불러줄게

Out of nowhere, out of my blues

그냥 우울해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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