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즈음에 NASA에서 나름 중대발표라고 한 것이 있었지요.

사람들은 외계인이라도 발견되었나!? 하고 궁굼해했지만,

실제 소식은 1977년에 발사되었던 보이저1호가 태양계를 벗어났다는 이야기였지요.


뭐랄까, 사람들은 김이 샜다는 반응이었지만,

저는 그것을 보고 의외로 과학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엄청나게 감성적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지던 보이저 1호와, 그 행적을 계속해서 지켜보아왔고,

인류의 물건이 역사상 최초로 태양계를 벗아났다! 라는 사실을 과학적인 기록이라는 명분 아래,

굉장히 감동한 듯한 느낌으로 발표하는 것 같아서 왠지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이져1호가 태양계 외곽을 여행하던 1990년 즈음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이 강력하게 주장(라고 쓰고 생떼라고 읽습니다)해서,

보이저1호의 방향을 돌려 마지막으로 지구 방향을 촬영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당시 NASA에서는 '과학적 의미'가 없다! 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칼 세이건은 꼭 그 사진을 찍어서 어떤 미학적, 감성적인 것을 남기고 싶었나봅니다.


그리고 결국 찍혀진, 태양계 외곽에 있는 보이저1호의 눈을 통해 바라본 태양계 언저리에서 정말 작고 희미하게 빛나는 지구.

칼 세이건은 이에 대 글을 남겼습니다.


"저 점을 다시 보자. 여기 있다. 저것이 우리의 고향이다. 저것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영위했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의 총합, 확신에 찬 수많은 종교, 이데올로기들, 경제적 독트린들, 

모든 사냥꾼과 약탈자, 모든 영웅과 비겁자, 문명의 창조자와 파괴자, 왕과 농부,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들,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희망에 찬 아이들, 발명가와 탐험가, 모든 도덕의 교사들, 모든 타락한 정치인들, 

모든 슈퍼스타, 모든 최고의 지도자들, 인간 역사 속의 모든 성인과 죄인들이 저기 - 태양 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의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

- 칼 세이건 -


...

어쩌면 진짜 과학자들이 진정 순수와 낭만을 가진 청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자연현상이나, 우주와 같은 거대한 미지에 대한 연구의 집념은, 

확실히 이익이나 계산, 이성보다는, 그 전에 그에 대한 경이와 미학적 접근이 전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2.


칼 세이건은 어찌되었건 위 사진을 보면서, 아, 사람이라는 존재가, 인류라는 존재가 정말 작았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나봅니다.

확실히 우주 단위로 보면 지구는 그 커다란 우주의 한 먼지일 뿐이고, 

인간 내지 인류는 그 먼지 위에 사는 티끌 안의 티끌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재와 의미를 옹호합니다.

인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옹호하고, 예찬하며, 때로는 비판하는 휴머니즘은,

우주의 무한한 규모를 알게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한 이데올로기이죠.


하지만 가끔, 휴머니즘이 전분야로 확장되서, 인간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강요하는 것을 지켜보고 경험하다보면 숨이 막힐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가능성이 큰 존재다, 꿈을 이루자, 열정을 가져라!!! -와 같은 현대 자본주의와 합체한 휴머니즘이 말하는 그런 메세지들 말이죠.

때때로 이렇게 전이되고 권력화되어버린 휴머니즘은 역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도 합니다. (하는 것 같아요)


저만해도 당장 취업도 어렵고, 나 스스로는 보잘 것 없고,

자그마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하기 버거울 때가 있는데,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부모님도, 친구도, 선배들도, 미디어도, 영화도, 게임에서도

주구장창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해라, 너의 인생을 의미있게 만들어라' 라는 메세지를 듣다보면,

그 좋은 인간 스스로의 존엄 내지 가능성, 의미라는게 가끔은 정말 나를 옹호해준다기보다는,

구속하고 짇누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맞아요, 제가 조금 삐뚤어진 캐릭터이긴 합니다 T.T)


나의 의미를 옹호하고 인정해주는 것은 좋지만,

너무 비대해지고, 만연해진 그런 메세지들은 도리어 의미있게 살아야함을 숙제처럼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고 억울해했던 적도 있습니다.

저는 그냥 조용히 살다 가도, 자그마한 나만의 만족이나 업적 정도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요즈음의 세상에서는 마치 그런 의미를 찾지 못하거나, 찾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문제있는 사람처럼 취급받을 것 같은 것이 무섭기도 했지요.



3.


그러다가 작년즈음에 문득 재미있는 책을 읽었었는데요,

'하찮은 인간 , 호모 라피엔스'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어요, 그리고 시니컬합니다.

"인류가 대단해? 흥, 웃기고 있네, 곰곰히 따져볼까?'

하는 느낌으로 인류가 지구 혹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찮고, 도리어 지구 혹은 세상에 유해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따져 짚어갑니다.

정말 우리가 이미 의식의 전제로 믿고 있던, '사람이라는 존재는 고귀하다'라는 생각과,

현재 사회나 문화, 문명이 가진 휴머니즘적 사고와 전제(그것이 문화적이건, 정치적이건, 과학적이건)를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

...는 순화고 그냥 '냉소를 담아 쳐부수는' 느낌이 강해요.


.


근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런 내용을 읽으면서 왠지 후련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상하죠?

기분 나쁘기는 커녕, 후련했어요. 정말로.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아 나 의미없이 살아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라는 묘한 후련함이 느껴졌어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결국 '계급장 떼놓고' 보면 특별한 의미 없이, 저기 사는 평범한 동물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냉소를 보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부모님과 크게 싸우고, 결국

"그래 살던지 죽던지, 네 마음대로 해!, 넌 내 자식도 아니야!" 라는 전형적인 대사를 듣지만,

그 안에서 자유라기엔 뭣하고, 그냥 그 방치와 의미두지 않음에서 느껴지는 묘한 후련함을 느끼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요즈음의 사회가 권하는 겸해서 강요하는,

그런 '의미있게 살아라'라는 숙제에서 살짝 해방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물론 책의 저자는 그런 의도로 쓴 것이 아니었겠지만요)

 


4.


물론 그렇다고 그 이후의 제 삶이 크게 변한건 아닙니다.

여전히 징징매는 취준생이죠 T.T...


그래도, 가끔 묘하게 위안이 되는 망상으로는 애용한답니다.

세상에 '너는 하찮아, 나는 하찮아, 우리는 하찮아' 라는 생각을 좋게 볼 사람이 있겠냐만은,


그럼에도 보고 느끼고, 감명받고, 또 마땅히 따라야할 의미가 너무 많아서,

어떤 의미가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고, 의미있어야함이 숙제처럼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이따금 '난 하찮아, 그러니까 그냥 떠다니는대로 떠다닐거얏!' 하는,

일종의 냉소적/자조적 탈의미화가 가끔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긴 하더라구요.


얼마전에 친한 형과 술 한잔 하면서 이 생각을 털어놓았는데,

'뭐야 이 놈' 반응보다는, 재미있다- 라는 반응을 해주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라건데,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하찮건, 의미없건,

우주 속의 먼지 오브 먼지에 불과하더라도,

그냥 내 생긴대로, 생각하는대로 떠다닐 수 있는

묘한 후련함과 자유로움을 가지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 인생의 의미는 그냥 내가 정할래! 정도랄까요.

그래서 요즘은 사회나 외부해서 말하는,

그런 강제적이고 숙제처럼 말하는 수많은 '의미'들을

나름의 필터링으로 걸러내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5.


결론은 보이저1호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하찮아!

근데 그것도 나름 괜찮은 접근법 + 자기치료법인데? 라는 생각까지 왔는데,

온갖 이야기를 다 꺼내놓고 어떻게 마무리할지를 모르겠어요.

쓰다보니 벌써 3시가 다되가는데 T.T...

에잇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도망가면, 내일 아침에 무플이던지 하겠지요.

혹시라도 다 읽어준 분이 있다면,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리고 싶을거예요.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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