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ebs.daum.net/docuprime/episode/7589
사실 방송된 지는 꽤 되었는데요, 며칠 전에 듀나님이 트윗에서 이념적 소비에 관해 언급하신 게 생각나서 링크합니다.

1. 예전에 듀게에서 이념적 소비 이야기가 나왔을 때 누군가 이런 댓글을 남겼던 걸로 기억합니다. "... 그게 옳다고 생각하시면 이념적 소비, 윤리적 소비를 하시면 되구요, 아니시라면 합리적 소비를 하시면 되죠..." 대강 이렇게요. 그 때 저는 그 이념적 소비라는 말이 뭔가 아니다 싶긴 했지만 반박하긴 어려웠어요. '동네 아는 분이 개업하면 일부러 가서 사 주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게 다 비합리적이고 이념적이라는 거냐?' 정도가 그 당시 제 생각이었죠.

2. 위의 EBS 다큐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게 이념적 소비라는 말에 대한 한가지 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로 사치품의 과소비에 관해 다루고 있지만 전반부에는 소비의 전반적인 부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요.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마트에 가면서 무의식 중에 부모의 취향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나, "소비는 무의식으로 사고, 의식으로 합리화하는 행동이다" "쇼핑은 감정이다. 우리가 그걸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등등의 말을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싶더라고요. 물건을 팔기 위해 심리적인 트릭을 이용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소비자를 단체가 아닌 개인으로만 한정한다면) 순수하게 합리적인 소비라는 것은 아예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생각하는 결론은, 가격과 품질이라는 것은 우리가 물건을 사는 데 있어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고, 구매를 결정하는 여러가지 요소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 회사의 CEO는 그 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3. 그런데 만약 소비가 감정이 주가 되는 행위라면, 이른바 윤리적 소비라는 것도 이성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감정이나 이미지의 작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제 생각엔, 그게 감정에 의한 행위라 하더라도 정당한 행동인지 여부는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 감정을 불러오게 된 배경에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논리가 있다면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그 논리는 아마도 철학자들이 이미 만들어 놓았을 거구요.

4. 만약 우리가 가격과 품질만으로 물건을 선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해 봤어요. 예컨데 스타트렉의 스팍이 살던 행성이 자본주의 체제이고 거기에 TV광고가 있다고 치는 겁니다. (저는 스타트렉 시리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묘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우선 광고 모델은 필요 없겠죠.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전지현은 '엘라스틴 했어요'를 읊조리는 대신 먹고 살기 위해 드라마나 영화 오디션을 봐야 했을 것이고, 김연아는 별볼일 없는 올림픽 순위에 만족하면서 빚갚을 걱정만 하고 있겠죠. 아이유가 그 손발 오그라드는 마이쮸 광고를 찍는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옛날에 찍은 그 빅브라더 광고도 만들어지지 않았겠죠. 광고 회사에 갓 입사한 돈없고 백없는 카피라이터 주인공과 그녀를 도와주는 기획실장님과 이 둘을 질투하는 부잣집 딸의 삼각관계를 다룬 드라마 같은 것도 더이상 나오지 않을 거구요.
TV광고는 소비자가 모르는 상품을 소개하는 기능 이상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스마트폰 광고를 포함해 거의 모든 광고는 아마도 BGM없이 상품의 정면과 측면 사진 두어장이 화면 왼쪽에 보여지고, 오른쪽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스펙이 나열되는 형태가 되겠죠. 폰트가 예쁜가, 문단 정렬이 잘 되어있는가 하는 것도 감성의 영역일 테니 이것도 상품 종류별로 표준 광고 포맷으로 통일될 겁니다. 이런 세계의 영화 광고나 포스터도 지금과는 다르겠죠. 티저 광고가 없어지는 대신 몇가지 스펙터클한 스틸 컷을 화면 왼쪽에 표시하고 화면 오른쪽에는 간단한 줄거리 한두줄에다가 감독의 과거 흥행성적, 제작비, 시사회 후에 평론가들이 매긴 별점 평균 같은 것들이 나열되는 형태가 되겠지만 이런 정보가 영화의 '품질'을 제대로 보여주기는 어려우므로 광고효과는 많이 떨어질 겁니다.
상품의 포장도 품질과는 무관하니 극도로 단순화 되겠죠. 우선 피자 박스에 이탈리아 국기 같은 것은 그리지 않게 될 겁니다. 애플은 재생용지로 만든 박스 속에다 아이폰을 뽁뽁이로 둘둘 말아 넣은 다음 청테이프로 뚜껑을 봉해서 매장에 갖다 놓겠죠. 마트의 과자류 코너는 흰색 바탕에 과자 이름만 적어 놓은 봉지들 때문에 눈이 쌓인 것처럼 하얗게 보일 거구요.
이 밖에도 재미있는게 많을텐데 제 상상력이 부족하군요. 뭐 더 없을까요?

5. 제게 합리적 소비라고 하면 떠오르는 광고가 하나 있어요.
http://www.youtube.com/watch?v=4exPauh5X_w
오래 전에 나온 포르쉐 광고입니다. 이 광고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대놓고 자기네 상품이 impractical, irrational, unnecessary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만드는 차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선전하는데 이게 그들이 강조하는 포인트죠. 차 자체의 품질과는 별 관계없지만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부분일 겁니다.

두서 없이 쓰다보니 이 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뭐,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3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0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458
58561 "고객이 원한다면 수익성은 포기해도 된다." [12] 오뚝이3분효리 2013.02.11 5400
58560 그래미상 스타 [5] 가끔영화 2013.02.11 1990
58559 (스포) '남쪽으로 튀어' 못들은 대사 질문 [3] Francisco 2013.02.11 1241
58558 신작 미드 pilot 감상: Do no harm, Monday mornings [8] 깡깡 2013.02.11 2067
58557 지루한 휴일에 본 이것저것들 [1] 시민1 2013.02.11 1265
58556 [펌] 남양유업의 진실 [2] Bluewine 2013.02.11 4166
58555 디지털플라자 갤S3 대란이 폭풍처럼 지나갔네요 [3] ELMAC 2013.02.11 2553
58554 연휴가 가버리네요 [1] Trugbild 2013.02.11 969
58553 정글의법칙 K [1] 달빛처럼 2013.02.11 2340
58552 명절 쇼크 [9] 닥호 2013.02.11 3503
58551 Community season 4는 보기 힘드네요. [4] herbart 2013.02.11 1526
58550 아래위 같은 색 한복이 궁금해요 [4] Tutmirleid 2013.02.11 3118
58549 올해 오스카 관전 포인트 ^^ [6] 감동 2013.02.11 1962
58548 드라마 바낭-힘내요 미스터 김 [5] 방은따숩고 2013.02.11 2527
58547 벼룩) 남성 패딩, 여성 자켓 [5] 오렐리아 2013.02.11 2685
» [이것도 뒷북?]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제2부 소비는 감정이다 [1] 해물손칼국수 2013.02.11 3224
58545 정글의 법칙 논란들을 보며 [26] 메피스토 2013.02.11 6710
58544 군대 웹툰 하나 추천합니다. [3] 유상유념 2013.02.11 2975
58543 추억의 코카콜라 88년 광고 [35] 슈삐유삐 2013.02.11 4950
58542 2호냥 떠나보내기 전 한 컷(구체관절인형 바낭) [6] hermit 2013.02.12 236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