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찌질한 사랑 이야기.

2013.02.25 01:04

바람따라 조회 수:5566

저와 비슷한 경우에 처한 분들이, 이곳에도 꽤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쓰라린 경험이, 그분들께는 좋은 약이 되어 저와 다른 행복한 결말을 맞았으면 좋겠어요.

 

 

 

대학을 다니다 학벌에 대한 욕심이 생겨

남들은 졸업에 가까운 나이에 다시 수능을 쳐서 다른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운이 좋아 장학금을 받으며, 기숙사에서 공부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공부만 할 리 없죠. 좁아터진 곳에 남자여자 섞여있고 남의 시시콜콜한 연애소사 정도가 유일한 낙인 법대 고시반이니까요.

알게 모르게 다들 마음주고 사랑하고 아파하고들 했습니다.

 

저 역시 저와 친한 한 아가씨에게 고백했다가 신나게 차이고

그날 밤 같은 OT조였으며 고시반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생(女)을 불러

'야 오빠 차였다. 위로주 한 잔 사도.'

하고 섭섭함을 달래려 했습니다.

 

그 동생이 같은 방 룸메를 데려온 게 그녀와의 첫 공식적 만남이었습니다.

과일소주를 홀짝이면서 '말 못하고 끙끙대는 것보다는 말하고 차이는게 남자의 훈장이다.' 하며 낄낄대다가

어느덧 그네들도 자기 이야기들을 꺼내놓기 시작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갔습니다.

 

그녀도 고시반 내에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재수생이고, 그 짝사랑하는 남자는 현역이라....어린 애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그 짝사랑남의 생일에, 뭐라도 해주고 싶지만 티가 나고 싶진 않다는 묘한 이야기를 하는 그녀에게

저는 값비싸지 않은 연필꽂이를 하나 선물해주면 가격이 비싸지 않으니 부담스럽거나 감정을 눈치채지는 않을 거고

대신 공부할 때마다 매번 볼테니 나름 좋은 선물이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해주었습니다.

 

 

며칠 뒤, 과외를 마치고 늦은 밤 고시반 기숙사로 향하는데

뜬금없이 오늘이 그 짝사랑남의 생일이라는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게,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말했던 생일 선물은 사주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서 사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지랖 넓게도, 고시반으로 가던 길 팬시점에서 예쁜 연필꽂이를 하나 사다가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이정도면 부담없는 좋은 선물이니 마음을 전하라면서요.

훗날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가 자신과는 관련도 없는 일에 신경을 써준 것이 참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친해진 그녀와 저는, 우연히 같이 듣게 된 교양 수업 하나로 더욱 가까워졌고

대학 두번 다닌 남자의 레포트 작성 노하우로(-_-;;) 레포트도 좀 도와주고 하면서

결국 학기를 마감할때즈음 찾아온 그녀의 생일에 용감한 고백으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전 키가 작은 그녀를 너무 예뻐했고 2년간의 교제에 단 한번의 다툼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던 우리의 사이에 암운이 찾아온 것은 교제 2주년,그리고 그녀의 생일이기도 한 그날 하루 전이었습니다.

 

 

 

 

 

 

생일 하루 전,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게 미안하지만 헤어지자고 얘기했습니다.

그전에 싸우기라도 했거나, 평소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었거나 했다면 그럴 수 있었겠지만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자기는 왜 생일과 기념일이 겹치냐며 무엇을 사줄거냐고,선물을 두 개 사달라고 애교있게 투정부리던 그녀였기 때문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맥박이 빨라지고,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오빠가 너에게 얼마나 좋은 남자친구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나 스스로는 내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정도는 들을 수 있는, 그런 남자친구였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전하고 다음 날, 학교 앞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에 입에서 나온 이별의 이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오자, 독실한 개신교인인 그녀의 어머니께서 별도의 헌금을 넣고 생일 기념 감사예배(?)같은 것을 드리는데,

그날 따라 장애인 형제로 구성된 간증인이 와서 열띤 간증을 하고, 그녀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지금 회개해야 하는 것은 어머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멀리하는 어머님의 딸입니다.' 류의 이야기를 나눴다는 겁니다.

어머, 우리 딸이 요즘 예배 잘 안오는걸 어찌 아세요, 신통하시네....라고 생각한 어머님,그리고 어머님의 말씀에 따라 그 다음 날 예배에 참석한 그녀는, 

 예배를 하면서  '신앙심이 부족한 오빠와 교제를 지속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계시'가 느껴졌다 합니다.

 

 

저는 눈앞이 벙벙하고 슬픔과 아쉬움이 분노로 뒤바뀌었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라니요.

 

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내가 너를 대한 지난 2년간의 마음이, 진실 여부도 명확치 않은 중동지방 잡신이 등장하는 개꿈만도 못하냐고 말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 이런 핑계를 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언제라도 오빠에게 돌아갈게.'라고 보낸 그녀의 문자를 보고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녀가 개신교인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스무살 이전까지는 미카엘이라는 영세명을 가진 천주교인이었지만 스무살이 넘어 머리가 굵어지자 기독경의 내용이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고 모순되어 있는데다

신의 모습도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만, 최소한 신이 있다하면 그것이 예수는 아닐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고 교회에서 나온 배교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도 흡연과 종교가 그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접근할지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는 두가지 요소였습니다만

 

여자에게 차인 날 위로주 자리에서 만난 그녀는,

그녀가 짝사랑하던 남자를 위해 선물을 구해다준 일로 친해지게 된 그녀는,

제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니기에

그 이후 그녀가 개신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멀리하기에는, 이미 마음이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교제중에도 그녀는 어쩌다 한번 집에 돌아갈 때 교회에 갈 뿐이지, 일요일이건 뭐건 저와 데이트를 즐기는 나일론 신자였기 때문에 크게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벼락같은 계시(?) 하나에 제가 쌓은 2년간의 성이 무너진 것을 본 저는 낙담했습니다.

 

헤어진 다음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와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받아주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서로 싫어서 헤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그 이후 6개월간 저를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저 역시 그녀에게 '일주일에 한번은 너와 함께 교회에 나가겠다.' '너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하지 않겠다.'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이자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게 양보와 배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종교는 양보와 배려가 없는 종교니까요.

이러한 저의 제안에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신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그녀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기독교를 모르다가 접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이었다가 그 모순을 깨닫고 뛰쳐나온 사람이었으니까요.

제 머릿속에 있는 성경의 모순은 어떤 일이 있다 할지라도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성과 논리로 똘똘 무장하여 그녀를 그곳에서 구출하자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을 무척 잘하는 달변가였고, 내 말과 글로 충분히 그녀를 이성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종교학과 학생처럼 종교서적에 탐닉하고, 기독교 죄악사와 러셀의 철학서적을 읽어가며 하나하나 논리를 완성시켜갔고, 중동 잡신의 이름을 빌어 제멋대로 돈과 인력을 끌어모으는 해괴한 미신에서 그녀를 구출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오산이었고, 지금까지도 제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후회한 행동이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20여년간 살아온 그녀의 세계를 날선 말과 혀로 파괴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보다, 눈앞에 있는 이 말랑말랑하고 덩치큰 청년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내가 더 좋아서' 그녀의 세계 바깥으로 나오게 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20대 중반이던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에게 그녀의 세계가 거짓임을 가르쳐주면, 그녀도 분명 나와 같은 배교자가 되겠지 라고 생각했을 따름이었습니다.

전 그녀를 상처입히기보다는 그녀를 더 사랑해주고 감싸주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긴 말다툼의 끝에 끝내는 '저능아'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멍청이' 라고 그녀에게 폭언까지 해버리고, 그녀가 20년간 살아온 안식처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멍청함의 댓가로 찾아온 것은 6개월간, 2주에 한번씩 간헐적으로 찾아온 연락두절과 재결합의 끝을 알리는 커플요금제 해제 알리미였습니다.

 

 

 

 

 

그 이후, 다른 여성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녀만큼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헤어진 지 1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도, 그녀는 꿈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저는 늘 웁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인데..'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던가요.

지금 제가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녀와 저의 지금은 변해있었을까요.

 

 

 

 

오늘 종교와 관련한 문제로 어느 회원분께서 큰 슬픔에 빠지신 것을 봤습니다.

가슴이 착잡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회원들 중, 성별이 다르거나 갈등의 원인이 다를지언정, 저와 같은 경우에 처한 분들이 꽤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내린 결론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는 아마 그 날 그때로 돌아간다면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증오와는 별도로

그녀를 더 많이, 내가 지금까지 후회해온 것들을 다 모아서 그녀를 그냥 사랑해줄 것 같습니다.

 

 

 

새벽에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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