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토커'는 정말 듣던 대로 각본에 문제가 있더라고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알프레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의 오마주 냄새가 물씬 나는 가운데, 뒤로 갈수록 지나치게 뻔하고 도식적으로 흐릅니다. 상징들(알, 구두, 벨트, 거미 등등)조차도 지나치게 뻔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소비해요. '박쥐'에선 초중반을 '떼레즈 라깽'으로 밑밥을 깔아놓고 후반에 박찬욱이 자기 놀고 싶은대로 노는 느낌이었다면, '스토커'의 경우 뒤로 갈수록 박찬욱의 연출에 힘이 붙으려 하는데 각본이 이를 옥죄는 바람에 결국 고꾸라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영화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특히 저택이라는 실제적 공간에서 벽, 창, 거울 등을 이용해서 인물들의 세계를 분리하거나 혹은 그 안의 동질성을 확인시키고, 혹은 프레임이라는 영화적 공간 안에서 유사한 작업을 행하는 가운데, 찰리와 이블린 간의 성적인 관계와 찰리와 인디아 사이의 살인을 매개로 한 또다른 성적인 관계를 설정해 놓고 앞에서 말한 공간 연출을 통해서 이 관계 상의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연출은 정말 탁월하더군요. 이야기 전개와도 맞아떨어져서 굉장히 단순하고 도식적인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메트로놈의 소리가 집안의 다른 소리와 겹치게 하는 식으로 집 안의 어떤 기운이 번져가는 듯한 연출, 교차편집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키는 동시에 인물들 간의 세계의 접점을 짚어내는 연출도 좋았어요.

 

음악을 클린트 맨셀과 필립 글래스가 맡았더라고요. 이 영화에서도 오마주한 듯 보이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영화화한 31년작의 dvd가 99년에 재발매될 때 필립 글래스가 작곡하고 크로노스 콰르텟(클린트 맨셀과 같이 영화 음악 작업한 적이 몇 번 있죠.)이 연주한 현악 4중주 곡이 추가된 바 있다는 사실을 유튜브 검색 중에 우연히 알게 됐어요. 흥미로운 인연이구나 싶었어요.

 

 

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은 정말정말X100 좋았습니다. 홍상수 영화는 늘 기대감을 안고 보는데, 기대를 배신하는 일이 없어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 상황과 대사의 반복 및 변주 등 익숙한 장치들이 이번에도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며 '상투성에 대항하기'를 몸소 실천하도록 합니다. 그 와중에 이번에는 꿈과 비밀, 소문이라는 소재에 중점을 두고, 영화가 뒤로 향해 갈수록 기표들이 본래 그것들이 가리키던 대상과 동떨어져 그 어느 것도 가리키지 않는 기표 그 자체로만 남게 되는 기묘한 과정을 추적합니다.

 

나아가 해원이 다시 사직동에 갔다가 김의성이 연기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하면서도 공허한 기표 덩어리와도 같은 인물과 조우하고, 다시 남한산성에서 또 다른 비밀을 간직한 이들과 만나 그 기표 덩어리 인물에 대한 대화를 하고, 이선균이 연기하는 이 감독 캐릭터와 일련의 반복과 변주를 지나고 나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우리가 줄곧 따라다녔던 해원조차도 그저 기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딸'이었던 해원은 어느새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 되어 '존재의 외로움'이라는 책을 읽으며 말, 말, 말, 소문, 소문, 소문, 비밀이 아닌 비밀 사이를 떠나니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기표에 의해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압도되어 버려 결국 그 누구와도 실질적으로 맞닿을 수 없는 공허한 기표의 유령이 되고 말아요. 슬픈 일이죠.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서촌 근처라 익숙한 풍경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북촌방향' 때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북촌에 비해 서촌이, 좀 더 내 향기가 짙게 배어 있는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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