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하나 썼습니다.

2010.08.1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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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집'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오래 묵은 구멍가게였다.

함석 지붕 위에 걸려 빗물에 녹물 묻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누구라도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 짐작케 했다. 나는 코를 질질 흘리며 깡통집 앞마당에서 동네 애들과 깡통을 차며 놀았다. 사실 깡통집 앞마당 골목밖에 놀 데가 없어서기도 했지만. 가끔 술 취한 '아재'들이 거기서 한 잔 걸치다 말고 술김에 백 원짜라 한 장 돈푼깨나 쥐어 줄지도 몰라 기대했었다. 어쨌거나 깡통 골목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놀이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술 된 아재들은 우리가 사랑오와서 지갑을 열기보다는, 술김에 '씨 레이숀' 깡통을 더 많이 던져댔던 것 같다.

쇠를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 폭양이 내리쬐던 어느 여름, 그들이 왔다. 배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이 아닌 말쑥한 사람들이었다. 친구 인보가 중얼거렸다. "절마들은 저래 입고 안 덥나?" 한여름인데 긴 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깡통집 주인 영감이랑 거기 있던 아재들하고 뭐라 뭐라 얘기를 길게 했다. 어떤 아재는 누런색 오천원짜리를 지갑에서 꺼냈다. 그들이 돌아간 후 그 아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는 별안간에 보름치 '까까'를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생겨서 기뻤다. 그 후로도 그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왔다. 우리는 분위기 때문에 그들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느 새 내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ㅡ 그 양복쟁이들을.

여름도 다 끝나가던 어느 목요일, 아침부터 서녘이 어둑거렸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임자, 오늘은 빨래 다 걷어 놓으소. 쏟아지긋다." 알았으요,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젖히고 아버지의 음성은 나를 향했다. "정두 니는 핵교 숙제 다 했나?" "... 아니예." 아버지는 내가 숙제 끝내기 전까지 나갈 수 없다고 못박고서 출근길에 올랐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버스 정거장 어귀에서 아련하게 사라지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니 오데 가노!" "인보 즈그 집에서 숙제하고 오께요!" 달음박질치는 내 그림자 뒤편으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뒤꼭지를 때렸다. "니 또 깡통집 가서 놀라 캐샀제!" 나는 그 소리를 들은 체 만 체,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을 뛰어내려갔다.

비가 쏟아졌다. 빗물이 달음박질쳤다. 그 언덕을 뛰어내려온 건 나와 빗방울 뿐만은 아니었다. 인보가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다른 애들도 보였다. 다들 언덕배기 위에서 이 쪽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들도 똑같이 뛰어내렸다. 아재들이 마구 구불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인보는 울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소낙비가 내렸다. "정.. 정두야! 울집, 흑, 흐흑" "뭐라카노, 좀 단디 말해봐라" "흐, 흐억, 울집이, 우리 집이 막 깡통 되뿌따. 흐엉" 말을 더 이을 필요는 없었다. 아재들도 술에 취하지 않아 맨정신으로 울고 있었다. 쇠 파이프를 들고 작업복에 워커발 신은 까까머리 아재들한테 두들겨맞아 울고 있었다. "아이고, 저거, 저거 가재도구라도 쫌 챙기야 되는데!" 인보네 어머니의 외마디소리가 빗소리 속에 희미하게 귓전을 때렸다.

멀리 언덕배기 위에 양복쟁이들이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마치 작업복의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 같았다. 저것들이 친구네 집을 부쉈다. 깡통으로 만들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 가려 했다. 하지만 갈 수 없었다. 소낙비 사이로 쏟아지는 몽둥이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깡통집 옥상에 올라가서 내 친구 집 뿌사지 마라고 소리질렀다. 손에 짚히는 대로 레이션 깡통을 집어던졌다. 용역들 중 하나가 그것들 중 몇 개를 도로 집어던졌다. 한 개가 나한테 왔다. 나는 다 떨어진 러닝셔츠로 언제나 그랬듯 코를 스윽 닦았다. 콧물 대신 시뻘건 코피가 묻어나왔다. 런닝구에 눈물이 함께 배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났다. 우리 집도 살던 데에서 이사를 나와 지금 사는 곳에 정착했다. 용산동 5가 ○-○○번지 ㅡ 얼마 전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방송국 사람들이랑 닭장차가 왔다갔다했다. 그 날 밤 뉴스에 우리 동네가 나온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아침에 그 난리 버꾸가 난 걸 보고 '용산 참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맥주 한 캔을 아버지 몰래 따 놓고 뉴스에 나온 우리 동네를 보며, 나는 '전에 살던 우리 동네'를 생각했다.

나중에 한 번 일부러 길을 돌아 그 곳에 가 본 적이 있다. 높다랗게 들어선 언덕배기 아파트 사이로 깡통집 하나만 덜렁 서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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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구성에 고민이 있습니다. 마지막 두 문단을 두고, 둘 중 하나만 써서 결론을 분기시키든가, 아니면 이것처럼 둘 다 병기해서 쓰든가. 어떻게 끝맺는 것이 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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