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것은 지난 9월 이었습니다. 3년만에 학교에 복학했고 그 이전에 헤어진 사람과의 아픔이 많이 무뎌지긴 했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만나 또 같은 실수를 하게 될까봐 겁이 나서 그간 데이트메이트로 만났던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을 거치며 

아, 나는 이제 연애같은걸 안 하고 싶나보다 싶었습니다. 


복학을 하며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은 그야말로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

또 어떤 끔찍한 심적 고통이 있을까 혼자 제발 저리며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났고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갑내기, 두 학번 아래의 그 친구는 제가 4년 동안 참으로 만나고 싶어했던 상상 속의 상대였습니다. 

긍정적이고, 자기 일 열심히 하고, 대인관계 좋고. 

그렇게 딱 반년 정도를 만나고 지난 주말에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절대 좋은 끝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이별을 당췌 예상조차 하지 못 했거든요. 


그 사람은 누가 봐도 좋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워낙 자기 공간이나 생활이 뚜렷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게 힘겨워 보였고 무엇보다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에게도

자기 이야기를 단 하나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싸우면 힘들어서라도 이야기할법 한데 그런 것도 없고 성적 고민, 공부 고민, 집안 고민, 돈 고민

이런 것도 모두다 스스로 해결했습니다. 한번은 그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가 저와 같은 이유로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걸 봤어요.


"왜 너는 항상 누가 먼저 뭐 하자고 할때까지 아무것도 하자고 하지 않아?" 


그나마 저에게는 연락도 잘 하고 데이트 신청도 잘 하고 그랬는데도 저는 그게 항상 서운했거든요. 항상 뒤쳐져있다는 느낌.

근데 뒤쳐져있다는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들이었어요. 그 사람이 하는 공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기적인 목표, 그 사람이 매일 가는 헬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해놓은 그 일정들이 항상 저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따지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도 이해 못 해줘?


네. 저는 이해를 못 해줬어요. 제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걸 못 본거죠.

그렇다고 제가 한 시간에 한번씩 전화를 하거나 어딜 이동할때마다 알려달라거나 그런 부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연락, 보고를 철저하게 잘 하긴 했지만 그건 그쪽이 자진해서 한거였지 제가 원한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던 사람이 그런 행동을 소홀해질라치면

서운해하긴 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제가 실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심적으로 너무 힘들고 괴로운 상태라 위로를 받고 싶었고 

기존에 잡혀있던 제 친구들과 저의 약속을 취소하고 그 사람을 만났어요. 두번이나요. 물론 그 사람도 제가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한 것은 알고 있었고요.

하지만 만나서도 별다른 내색 없이 함께 즐겁게 시간을 보내주어서 그 사람에게 미안하진 않았습니다. 되려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이 컸어요.

내가 그 애들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구해야지. 너희보다 걔가 중요해서 그런 건 아냐. 그저 내가 너무 힘들었는데

위로를 그 애에게서 받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하지만 새 학기가 시작되고 저는 또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었고 그러다 말싸움이 커져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말이 그 사람 입에서 나왔고

이틀 뒤 그 사람은 이별을 선언했습니다. 마지막 말은 그랬어요.


이제 너를 못 좋아할 것 같다. 사실 마음이 점점 식어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노력하고 있었다. 이제 너와 잘 해보려는 노력조차 하고 싶지 않다. 혼자있고 싶다.

무엇보다 친구들 약속 취소하고 나를 만나려는 너에게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생각할 시간'을 운운하던 날의 낮만 해도 밥 먹었냐며, 집에는 들어갔냐며, 보고싶다며 온갖 애교스러운 이모티콘을 보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원래 마음이 식어가고 있다고 하니 저는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한번도 연애하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본 적이 없는데, 정말 구차하게 매달렸습니다.

무릎을 꿇기도 하고 울면서 전화를 걸기도 하고 폭탄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너무 나무라진 말아주세요. 정말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러면 이럴수록 자기가 날 더 싫증낼거라는걸 모르느냐, 이미 마음 접었다 더이상 기다리지 말라 라고 하더군요. 

2월 마지막주에 나누었던 채팅과 편지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 속에 계획했던 여름휴가나 커플링 같은 것들이 그에게는 정말 노력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일요일 저녁에 마음을 접었고 정리하려고 주변의 흔적을 모두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도 태우고 사진도 태우고 번호도 지우고 커플요금제도 바꾸고.




그런데 그와 저는 여전히 같은 학교고 심지어 걸어서 십분 거리에 삽니다. 같이 동네에서 데이트를 하는 게 일쑤였고 제가 자주 돌아다니는 신촌이나 명동 광화문

홍대나 상수 같은 곳 모두 이미 그와의 추억으로 가득 채운지 오래입니다. 그를 만나기전부터 다녔던 곳인데도 그곳들이 마치 '우리만의 공간'인것처럼 느껴집니다.

학교가 작은 편이라 여전히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치고 그가 아니면 그의 친구들이라도 매번 마주칩니다. 그걸 피해다니다가 애써 괜찮은 척 웃고 다니다가

그러다 어느순간 그를 찾아 눈을 굴리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또 다시 반복입니다. 믿을 수 없어. 니가 어떻게. 


그러면 안 되는 행동이라고 알고 있는 건 다했습니다.


하지말라는데 계속 전화하고 문자 보냈고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고 

그의 집앞에 찾아갔고

밥도 못 먹고 술만 마시고 (원래 주량 소주 한 잔입니다. 근데 오늘만 해도 한병 넘게 마셨네요.)

심지어 오늘은 수업도 못 듣고 나와버렸습니다. 도무지 앉아있을수가 없어서요.


심적으로 많이 힘들던 시기에 (그러니까 누굴 만나면 안 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스로의 key를 찾아야 했어요, 그때.)

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참 많이 잘해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살았다는걸 깨달았습니다.

그가 '나에게 너무 의지하는것 같아 부담스러워' 라고 이별할때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습니다.

올 초부터는 상담도 받고 있었고 점점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그에게도 짐이 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데 그 과정의 시작인 지금, 하필 모든 게 새로 시작되는 이 3월에 그가 저로서는 눈치도 못 챈 이별을 던졌고 

저를 쳐다봐주지도 않습니다. 


그 사람이 제 인생의 목적도 아니고 전부가 아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 없이도 잘 살 수 있단 걸 알고

그간의 이별이 그랬듯 이 역시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길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했던 이별 후의 아픔과 너무나 다르게 느껴져요. 과거의 이별이 '상대와 나의 사랑 중단' 이었다면

이번 이별은 '상대와 나의 사랑 중단, 그리고 나의 붕괴'같아요. 

이미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더 약해진 느낌입니다. 올 봄에는 일도 잘 풀리고 어느 정도 생활이 틀이 잡혀가고 있었는데

단번에 저는 쓰러졌고 그 일들은 되려 지금 저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올해까지 학교를 다니고 올해는 특히 더 학교에서 이것저것 많이 할터라 눈에 자주 띌 거에요. 

학교가 워낙 작기도 하고 에너제틱한 사람이라 그럴겁니다. 

저도 휴학을 할 순 없어요. 3년이나 쉬었고 이제는 학교를 마쳐야 합니다. 저 역시도 저의 미래설계를 해야하고요.

하지만 학교에서 그를 마주치면, 그와 함께 걸었던 교정을 거닐다보면, 그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전거가 서 있는 걸 보면

숨이 안 쉬어지고 너무나 괴로워집니다. 오늘도 네시간을 멍하게 캠퍼스에 앉아있다가 숨을 못 쉴것처럼 헐떡여져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한번만 받아달라 널 잡으려는게 아니라 지금 나에게 조언이 필요해서 그렇다며 마지막까지 의지를

하려했고 미안하다 내가 미쳤었다 지금 내가 이렇다 이해해달라 잘 지내라 라고 문자를 연달아 보냈습니다. 


이미 갈때까지 간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하는 걸 넘어 더이상 저에게 자존심 따윈 없습니다. 


원래 주변 지인들 눈에 자기 스탠스 분명하고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주관 뚜렷하고 강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이라 생각하며 몇 년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제 지인들은 경악하고 있고 (제가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그걸 제가 느끼니까 이제 그만할 법도 한데 해선 안될 행동 해선 안될 생각 해선 안될 말 같은 걸 할때 저는

꼭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백주대낮에도 제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행동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것도 그저 그런 이별의 연장선일까요?


사실 이제 더이상 그가 돌아오길 바라진 않습니다. 대신 얼른 이 과정을 치유하고 제 스스로 저 자신을 의지할 수 있게 살고 싶어요. 


억지로 버티다보면 된다, 는 저에게 현실적인 조언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답이라는걸 알고 있지만 제가 억지로 버티다가 며칠째

무너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그런걸까요? (오늘로 닷새째입니다.)


정말 제가 많이 간절합니다. 겨우 술이 깨서 샤워를 하고 글을 올립니다. 조언을 주세요. 

이별이라는건 참 해도해도 적응이 안 되네요. 점점 더 힘들어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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