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해적당의 경우

2013.03.15 18:32

모퉁이가게 조회 수:3129

밑에 스웨덴 해적당 이야기가 나와서 잠시 독일 해적당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해적당은 스웨덴에서 시작된 운동이지만 독일에서 제일 성공을 거두었죠. 2011년과 2012년에는 무려 4개 주 선거에서 의회에 진입하면서 사민당, 기민련, 녹색당의 뒤를 잇는 제 4 당이 되었습니다. 친기업 리버럴 성향의 자민련은 경제 위기 이후에도 줄곧 감세 정책 얘기만 해서 표심을 완전히 잃었구요. 한 때 지지율 조사를 하면 자민련 2%도 되지 않아서 시사풍자코미디의 단골 소재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같은 시기 해적당은 심지어 녹색당을 앞지르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요. 대략 10%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해적당은 정책결정과정의 투명성 증대와 인터넷을 활용한 전자식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모토로 내걸었고, 또한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에도 반대하는 기조를 취했습니다. 

다른 내용은 저도 잘 모르고 이 논쟁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으니 지적재산권 얘기만 해볼게요.

작년 4월 해적당 의원인 율리아 슈람이 팟캐스트에서 지적재산권은 "역겨운 개념"이라고 공격했습니다. 같은 해 9월에는 자신의 글을 모은 책이 온/오프라인으로 발매되었죠. 그런데 이 책이 온라인에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현행법에 따르면 저작권법 위반이죠. 슈람의 출판사가 온라인에 떠도는 해적판(묘하네요) 삭제 요청을 냈고 이것이 슈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습니다. 

슈람과 해적당은 "(내 블로그를 구독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독자층을 겨냥해 아날로그 형태의 책을 낸 것"이며 "이를 위해 출판계약을 맺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출판 관행에 따라야 한다"고 변명했죠. 그렇지만 그럴 거면 왜 굳이 랜덤하우스라는 대형 출판사와 계약을 했냐는 논박에는 속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해적당의 이미지는 물론 정책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진 내분과 중요 정치 사안에 대한 당론의 부재, 이들이 개발한 직접민주주의 플랫폼에 대한 시민들의 무관심 등으로 한계를 보인 해적당은 요즘 자민련과 입장이 역전되었습니다. 올해 있을 주 선거, 이보다 더 중요한 9월 연방 총선거(연방의회의 총리가 새로 뽑히게 되죠)에서 해적당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리라는 관측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습니다. 

지적재산권과 저작권법에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죠 (비틀즈 팬으로서 이 점은 정말 뼈저리게 공감합니다). 하지만 지적재산권을 창작자의 동의없이 '무시'하는 게 과연 창작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지적재산권을 비판하는 핵심 논거가 창작자가 공정한 몫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이라면 우선 유통과정의 불합리를 해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적재산권과 저작권법의 불합리를 지적하고 그래서 전략적으로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창작자의 입장에 서면 결국 이 제도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걸 독일 해적당의 사례가 보여주었죠. 

지난 주에는 독일 해적당의 얼굴 마리아 바이스반트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도 온/오프라인에서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합니다. 단 바이스반트는 출판사에게 전자책에 '복사 방지 기능'을 뺄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바이스반트 본인도 인정하듯이- 책을 공짜로 풀겠다는 것도 아니고 창작자의 권리를 없애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이스반트는 창작자의 권리가 더 커져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출판사/유통사와 창작자 간에 힘의 불균형이 있다는 것이죠. 바이스반트는 "내용이 좋으면 돈을 내고 사보게 되어있다"고 말했습니다. 역시 협의에서 창작물이 공공재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셈이죠. 

양질의 책을, 영화를, 음악을 듣고 싶으면 유통 과정을 축소하는 게 창작자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몫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거나, 아니면 창작자가 더 많은 몫을 받게 되겠죠. 애초에 불씨가 된 서점에서 책 보기는 - 서점이나 출판사, 창작자가 이를 딱히 막지 않는다면 - 다른 사람이 뭐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자리에 앉아서 다 읽을 정도로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하고 재미있었다면 그런 경험을 선사해준 창작자에게 정당한 몫으로 돌려주는 게 개인적으로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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