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사벨라 버드'라고 알려져 있는 비숍 여사는 대개 중학교 교과서 속에서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숍은 그의 남편 이름이다. 우리는 흔히 그녀를 '구한말에 한국을 여행했고 서양에 알린 사람'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성공회 목사 집안의 딸로 자라났다. 가족간에 우애는 있었으나 모친과의 사별, 부친의 사정(교구 내의 교인들과 갈등이 있었다) 및 개인적인 정신 세계, 건강상 이유 등으로 약간의 고난을 겪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배려로 미국에 있는 친척을 방문한 후 개척시대의 미국을 생생히 담은 여행기를 '익명'으로 펴 낸다. 빅토리아 중기에는 여성에 대한 제약이 많았기에 익명으로 첫 여행기를 낸 것이다. 미국 여성계에서는 이러한 사정 때문에 버드를 여성 권익 투쟁사의 선도적 인물 중 하나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호주와 태평양 제도, 하와이에 대한 책을 두 번째로 펴낸 이후, 다시 미국 로키 산맥 여행을 하며 그녀는 영국에서 일약 스타가 된다. 그녀의 세 번째 저서인 '로키 산맥에 간 숙녀'는 실존 인물과의 짜릿한 로맨스를 담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개척민이었고 (적어도 버드의 묘사상으로는) 와일드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성미가 있는 남자였다. 플리트 스트리트의 저널리즘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에, 품행에 제약 많은 영국의 중상류층 여성들은 버드의 책에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열광했다. 그것은 그녀들이 한 번쯤은 상상해 볼 만한 일탈과 모험, 엑스터시를 만족시켰다. 인터넷도 영화도 없던 시대다.

그리고 우습게도, 지금 쏟아지는 한비야 씨에 대한 비판과 비슷한 이야기가 19세기 영국에서도 재연되었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잣대로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도 많았고, 그녀에게 열광하는 추종자도 많았다. 그녀에 대한 비판 중에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우스운 것도 있었지만 일부 비판은 지금도 통용될 만한 것이었다 - 로맨스의 상대방에 대한 프라이버시 문제 등이 그것이었다. 한편으로 그녀는 싱가포르와 베트남,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며 점점 더 유명해졌다. 인도 여행에서는 영국 정부의 위장 첩보활동 계획과 맞물려, 테헤란까지 영국군 대위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여정이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페르시아 고원은 여행자에게 위험한 지역 중 하나이고, 그 당시에도 외교적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는 오랫동안 교우관계가 있었던 의사 비숍과 마침내 결혼하기로 한다. 로키 산맥의 개척자와 로맨스를 그린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세월 동안 버드는 다른 남자들에게 별로 성적 매력은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녀를 정신적으로 후원해 왔단 비숍은, 얄궃게도 이사벨라와 결혼하고 채 5년도 되지 않아 타계하고 만다. 환자를 치료하던 도중 얼굴에 튄 고름 독이 옮아버린 것이다. 죽음은 지금보다 훨씬 가까이 있던 시대였다. 이사벨라는 이후 남편이 하던 여러 일들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그는 선교 봉사자였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비숍 기념 병원을 세우고, 그녀 자신도 따라서 선교 봉사자가 되었다.

버드의 후반기 저작 중 베스트셀러가 바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다. '로키 산맥으로 간 숙녀'를 출판할 때만 해도 그녀의 글은 재미는 있었지만 도덕적으로 비판할 부분도 존재하는, 결함 없지는 않은 글이었다. 그러나 조선으로 여행 온 이사벨라 버드는 단순한 늙은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유일한 여성 왕립 지리학회원이었고, 여행 경험도 풍부하며 많은 공부를 통해 매우 전문적인 역량을 이미 체득한 인류문명학자에 가까웠다. 소설가 이인화 씨는 이 책을 국문으로 번역하면서 버드의 날카로운 식견에 찬탄했다고 한다. 그녀는 조선을 여행하고 일본, 중국을 몇 차례 방문하며 짧지 않은 시간을 동아시아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녀의 여행기는 견문록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버드의 새 저서를,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격변 속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그리고 가장 최신의 르포르타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듬해에 출간된 중국 여행기는 전작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처럼 폭발적 인기는 얻지 못했다. 버드는 이후 중국 여행을 한 번 더 준비하다가 노환으로 타계하였는데 그녀의 트렁크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런던에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한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생애를 줄줄이 읊다 보면, 본문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한비야의 케이스와 상당히 닮아 있다. 위험한 지역에서의 여행, 그리고 세밀하게 말하자면 부적절한 면도 있지만 일단은 재미있는 여행담. 사실 조금은 과장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반화되지 않은 분야에서 먼저 길을 걸어간 역할. 그리고 선교와 봉사. (단, 버드의 경우에는 주로 남편의 기념사업으로서의 의료업에 더 신경쓴 것 같다.)

이쯤에서 질문을 한 가지 던져 본다. 만약 이사벨라가 지금 한비야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같은 것 때문에 30대에 여행을 그만뒀다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같은 저작이 완성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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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에 쓴 글이니... 참 이 한비야씨 떡밥도 돌고 돌고 도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이 글로 인해서 제가 듀게에 커밍아웃(?)한 셈이 되었군요.

그 전에는 가입도 안 하고 가끔 글만 읽다가, 블로그 글이 뜬금없이 링크되길래 신경쓰여서 가입한 게 시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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