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새겨지는 순간들.

2010.08.21 16:07

키프키프 조회 수:2404


(아주 길고 개인적인 연애 잡담이랍니다. 온전한 바낭이지요;)


두 달 전 쯤 남자친구와 이별 했어요.
처음엔 허전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매일같이 이런 저런 약속을 만들고,
조금 지나서는 그런 것도 시들했고 그냥 그 사람이 보고 싶었어요.
한 달이 지나서는 아는 분이 주선해 준 소개팅에 나가서 방실거리며 웃었는데
속으론 남자친구 생각만 더 나서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고요.


남자친구랑 저는 상대방이 세상에 없는 것 처럼 인연을 뚝 끊지는 않았고
이제는 친구처럼 가끔 연락해요. 하지만 서로의 일상에서는 사라졌죠.



우리가 아직 함께일 때,
어느날 남자친구 회사 근처에서 일이 늦게 끝난 저를
그 사람이 집에 데려다 주러 왔어요.
주차해 놓은 차를 찾으러 둘이 손잡고 그 사람 회사로 걸어 가는데,
저는 그 사람 회사에 처음 가 보는 거였고, 조금 걷다가 제가 물었죠.

"아직 멀었어?"

"다 왔어. 열걸음만 가면 되."
그러고는 둘이서 걸으면서 할 걸음씩 세어 나갔어요. 하나, 둘, 셋..
다섯 걸음 걸었는데 생각보다 갈 길이 멀었던지
그 사람, 갑자기 보폭을 엄청 넓히고ㅎㅎ

나도 따라서 마구 보폭 넓혀 걷다가

어쨌든 둘이서 '열!!' 외치면서 열걸음만에 도착했어요.
참 이상하게,

이 사람과 보낸 그 많은 시간 중에 이 순간이 가장 많이 생각 나는 거예요.


그날 저는, 일이 아주 고된 하루였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작업의 결실을 보았던 날이었고

와인 한 잔 칵테일 한 잔 마셔서 기분 좋을 정도로 살짝 취해 있었고

하루의 끝에 그 사람 얼굴을 보니 좋았고
그 밤의 적당한 온도가,
그나마 밤이 되면 조금은 사랑스러워지는 빌딩숲 도시 풍경이, 
둘이서 꼭 잡은 손이
그 사람이 매일같이 일하는 회사에 처음으로 가 본다는 설렘이
그리고 열 걸음이 모자랄 것 같자 보폭을 넓히는 그 사람의 주체못할 귀여움이.
그렇게 그 순간의 모든게 너무나 좋았어요.

불과 몇달 전인데, 지금은 참 멀기만 하죠.



생각해 보면 각각의 연애사에는 가장 강렬하게 추억되는 한순간들이 있더라구요.
이십대 초반, 다시는 그러지 못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하고 함께 보냈던 수많은 시간 중에서

아직도 가끔씩 생각 나는 장면은 참 어이 없을 정도로 별 거 아닌 순간이예요.


아주 뜨거운 여름날이었는데
쥬스가게에서 제가 매우 좋아라하는 복숭아생과쥬스를 그날따라 특별가로 팔고 있지 모예요.
애인이 복숭아생과일쥬스를 향한 광기에 번뜩이는 제 눈빛을 보고
알아서 복숭아쥬스를 두 개 사줬어요. ㅋㅋ
그걸 양손에 들고 막 신나서 꺄꺄 거리는데 저 멀리 제가 타야할 버스가 오잖아요.
시간이 꽤 늦었고 왠지 막차일 것 같아서 막 뛰기 시작했는데
뛰다가 제가 철푸덕 넘어졌어요. 정말 철푸덕.
양손에 들고 의기양양하던 복숭아쥬스는 완전 다 엎어지고
반바지를 입고 있었던 탓에 제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뒤따라 뛰다 놀래서 달려 오신 애인님과 약국을 찾아 헤매이고 결국 막차는 놓치고...


어떻게 보면 그냥 악재 뿐인 일인데도, 그 순간이 그렇게 잊을 수 없이 좋아요.
복숭아쥬스를 두개 사서 내 손에 쥐어 주고는
신난 내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흐뭇해 하던 그 사람을 보는게
저는 또 그렇게 좋았더랬죠.



한 사랑이 끝나기도 전에, 사랑이 끝나간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하면
이미 마음엔 어떤 한순간이 새겨져

자꾸 과거에 욕심을 부리게 되요.
그때 같은 반짝임을 다시 되돌릴 순 없을까- 하고.

그래도 몇 번의 사랑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건지, 아니면 무뎌지는 건지
이별하면 과거의 순간에 욕심 내지 말고 앞을 보고 가자는 생각을 해요.
좋았던 순간들은 좋았던 대로 마음 한 쪽에 새겨 놓고
세상 다른 모든 감정들처럼 사랑도 흘러 가고 또 흘러 오는 거라고요.




p.s.
아아, 너무 자세히 적어서 지인들이나 당사자들이 보면 전줄 다 알겠다는 생각이..
설마 구연인들이 이 글을 보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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