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와서

2013.10.14 22:19

칠리 조회 수:4366

10월 4일부터 10월 12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한 영화는 총 32편(+아이튠즈를 통해 관람한 프린스 아발란체까지 포함)입니다.

좋았던 영화들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 / 압델라티프 케시시


이다 /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폭력녀 / 알렉산드로스 아브라나스


호수의 이방인 / 알랭 기로디


숏텀 12 / 데스틴 크리튼


떠돌이 개 / 차이밍량


글로리아 / 세바스티안 렐리오


탐 엣 더 팜 / 자비에 돌란


잃어버린 사진 / 리티 판


이기적인 거인 / 클라이오 바나드


프린스 아발란체 / 데이빗 고든 그린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 저 자신 역시 파란 머리의 소녀, 엠마에게 첫 눈에 시선을 사로잡히고,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가도, 깊은 슬픔에 잠기게 만드는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지나치게 인물들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덕분에 관객인 저까지 주인공들의 가슴 절절한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쥘리 마로의 원작인 『파란색은 따뜻하다』가 다소 진부한 이야기를 통해 통속적인 이야기의 방식을 따랐다면 케시시의 손으로 재창조된 <아델의 이야기>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시선으로 아델이라는 여자의 삶을 따라가는 살아숨쉬는 영화였습니다. 결국 영화를 본 관객들 역시 아델처럼 성장해있을 것 같고요.

 <이다> 역시 한 소녀의 성장담에 가깝습니다. 서원식을 앞둔 예비 수녀 이다가 하나뿐인 가족을 만나게 되고, 가족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 전반부의 추리물로 시작해서, 중반에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며 주인공들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이 무척 설득력있어요. 외로운 두 명의 소원했던 여자들이 서로를 만나 의지하면서 유대감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 아주 탁월했습니다. 50년대 폴란드의 전경이 담겨진 4:3의 흑백화면 역시 영화와 잘 어우러졌어요. 

 <폭력녀>는 이번 영화제동안 가장 감정 소모가 큰 영화였습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송곳니>가 그리스 뉴웨이브 시네마의 지평을 연 작품이라면 <폭력녀>는 그리스 영화 특징의 절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보이는 가정 모두가 각각의 비밀은 숨기고 있다는 식상한 소재지만 그 비밀에 도달해가는 과정이 너무 섬뜩하면서도 천진난만해서 무섭습니다. 감독이 미장센에 정말 공을 들였다는 게 확연히 느껴지는데 특히 사회복지사가 안젤리키의 집을 찾아와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집안 곳곳을 돌아보는 장면이 담긴 롱테이크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어요.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폭력에 무뎌지는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저까지 폭력에 무덤덤해지는 순간을 만끽한 것 같아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두 편의 퀴어영화 <호수의 이방인>과 <탐 엣 더 팜>은 주인공들의 원초적인 욕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했네요. <호수의 이방인>은 한 공간(호수)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일들(크루징)이 계속 해서 반복되다가 영화가 갑자기 장르를 비트는데 그 순간부터 본격적인 스릴러 영화의 방식을 따라가는 연출이 아주 훌륭했습니다. 특히 후반부의 무시무시한 전개 속에서 다가오는 엔딩은 숨 막힐 듯 했네요. <탐 엣 더 팜>은 작년에 본 자비에 돌란의 <로렌스>보다는 좀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만, 늘 그랬듯 자비에 돌란 특유의 화려한 연출이 돋보였어요. 덕분에 애인의 부재가 가져오는 공허함이 조금 더 절절하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후반부의 이야기가 지나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농장의 불안하고, 끈적하면서도 농엄한 공기를 스크린으로 옮겨내 노출 한 번 없이도 아주 섹시한 영화를 만들어낸 자비에 돌란의 능력이 부럽습니다. 

 데스틴 크리튼의 동명 원작 단편 "Short Term 12"를 장편으로 만들어낸 <숏텀 12>는 무척 사려깊은 영화였습니다. 사실 전 단편을 보고 (아이튠즈에서 3달러에 구매 가능합니다.) 기대한 작품이었는데 기대를 채워주는 영화였어요. 단편이 하룻동안 아동 보호센터의 한 관리자에게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의 나열이었다면 장편은 사건들에 살을 더 많이 붙였죠. 덕분에 마르코의 이야기나 제이든의 이야기도 훨씬 수용할 만한 결과물이 나왔고요. 다만 단편적인 보호센터의 아이들이나 작위적인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아쉽긴 하지만 이 단점들이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사운드트랙도 좋고, 따스한 햇살이 가득 담긴 촬영도 좋았고요. 주인공들이 아픔으로부터 치유받고,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진심어린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는 좋은 영화였어요.

 50대 여성의 공허하고 외로운 삶을 그려낸 <글로리아>는 기대를 잘 안 했던 작품이었는데 놀랐습니다. 13년 전에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를 찾아 살던 여자가 다시 일생일대의 사랑을 만나면서도 그 부족한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좋았어요. 영화는 100분 가량 별다른 사건 없이 이어지는데 그 사소하고 일상적인 순간속에서도 인간 사이의 관계를 아주 잘 끄집어낸 영화였습니다. 덧붙여 움베르토 토치의 "Gloria"가 흘러나오는 엔딩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최고의 엔딩 중 하나입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기적인 거인>은 흡사 다르덴 형제의 감성을 이어가는 영화였는데요. 가족들의 무관심과 주위의 홀대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게 되는 꼬맹이들을 다룬 먹먹한 영화였습니다. 갑자기 벌어지는 끔찍한 비극이 지나간 뒤, 밖으로 나오는 아버의 모습이 눈물짓게 했고요. 한편 데이빗 고든 그린의 <프린스 아발란체> 역시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 의지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고속도로라는 뻥 뚫렸지만 갇힌 공간 속에서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고, 갈등을 빚지만 결국은 진정으로 의지할 삶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는 따뜻한 영화였어요. 엔딩에 등장하는 수많은 고속도로 인부의 모습을 보며 그들 역시 앨빈과 랜스처럼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하루 빨리 그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접한 차이밍량의 영화 <떠돌이 개>는 우선 당황스러웠습니다. 첫 번째론 영화가 도저히 컷을 할 생각을 않을 정도로 수많은 롱테이크로 이어져있었다는 점인데 두 번째로는 이상하게 그 말도 안되는 롱테이크씬들이 하나의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마지막엔 주인공들의 감정까지 이어진다는 점이었어요. 일상의 무의미한 긴 씬들이 하루 하루를 만들어내고, 또 그 하루 하루가 주인공들의 어깨를 점점 짓누르는 현실의 무서움이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영화였습니다. 크메르루즈 시절의 가슴아픈 역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잃어버린 사진>도 몹시 훌륭했습니다. 진흙인형들을 내세운 나레이션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역사를 기억해낼 것인지, 또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전달해나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 흔적이 여과없이 묻어난 영화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 부천국제영화제에서 만났던 <살인행위>와 좋은 콤비네이션을 이룰 것 같습니다.

그 밖에 관람한 영화 (선호도 순서)

돌이킬 수 없는 (클레르 드니), 구원자 (파비오 그라사도니아, 안토니오 피아자), 그랜드 센트럴 (레베카 즐로토브스키), 어느 남편의 부인 살리기 (다니스 타노비치), 천주정 (지아장커), 오마르 (하니 아부-아사드), 보그만 (알렉스 반 바르메르담), 물오리 (야니스 사카리디스), 팔레르모의 결투 (엠마 단테), 파라다이스: 호프 (울리히 자이들), 지난 날 (아쉬가르 파르하디), 아나 아라비아 (아모스 기타이), 닫힌 커튼 (자파르 파나히), 질투 (필립 가렐), 성스러운 도로 (지안프란코 로시), 미래 (알리시아 셜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는 것들 (몰리 수리야), 나와 엄마 이야기 (기욤 갈리엔), 헬리 (아마트 에스칼란테),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라이언 쿠글러), 그리그리 (마하마트 살레 하룬)

 클레르 드니의 <돌이킬 수 없는>은 초반부에 단편적인 정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나와 정리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그 작은 조각들이 결국 하나의 퍼즐을 맞춰내고,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냈을 때,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연출. <구원자>는 GV에서의 어떤 관객의 말처럼 (다른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살보가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 속 드라이버를 연상시켰습니다. 세상에 혼자 남은 남녀가 서로에게 결국 의지하며 서로의 삶을 구원해주는 과정이 정말 로맨틱했어요. 게다가 느와르의 장르를 고수하면서도 앞을 볼 수 없는 리타의 입장에서 액션씬들을 바라보게 만드는 촬영은 훌륭했습니다. <그랜드 센트럴>은 이야기 자체는 여느 치정극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원자력 발전소라는 배경이 주인공들의 격정적인 사랑과 연결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소의 묘사도 섬세했고요. 무엇보다 주인공 갸리와 카롤의 감정에 무척이나 공을 들여서 마지막 엔딩까지의 여운이 빛을 발한 것 같습니다.

 <어느 남편의 부인 살리기>는 나지프와 세나다 부부의 고충과 거리의 돌아가는 공장들이 효과적으로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공장은 쉬질 않고 연기를 내뿜는데 이 부부의 문제 하나 해결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참으로 답답하고 분했어요. 짧은 러닝타임동안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영화를 이어가는데 1분 1초가 아주 완벽하게 사용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화의 원제(영제)가 An Episode in the Life of an Iron Picker인데 '어느 남편의 부인 살리기'라는 제목은 지나치게 단편적인 것 같았어요. 결국 나지프의 선택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는가 했지만 더 많은 에피소드들(사건들)이 이 고철 수집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무서운 현실을 잘 반영한 제목이거든요.

 <천주정>은 저에겐 정식으로 보는 지아장커의 첫 영화였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에피소드는 숨 쉴 틈 하나 없이 몰입해서 봤지만 세 번째 에피소드부터 묘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만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엮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충분히 강렬했네요. <오마르>는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외벽을 넘어 다니는 청년 오마르의 활기가 좋았어요. 특히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여러가지의 이야기가 쉴 틈 없이 몰아치는데도 사건에 집중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도 좋고요. <보그만>은 칸영화제에서의 반응처럼 <퍼니 게임>, <송곳니>, <킬리스트>를 적당히 섞어놓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과는 무척 재밌었습니다. 부유한 상류층에 찾아온 불청객을 통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온 사방에 풀어놓는 영화였어요. 

 <물오리>는 올해의 발견이길 바라고 꿋꿋이 넣은 상영작인데 기대이상이었습니다. 현재 그리스의 경제 위기 속에서 이득을 취한 입장과 피해를 받은 입장의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사려깊은 영화였습니다.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이 담긴 음악들과 빛을 이용해 따스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촬영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감독의 연출 데뷔작인데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감독입니다. <팔레르모의 결투>는 흥미로운 설정덕분에 재밌게 봤지만 인물들이 지나치게 캐리커처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그래도 인간의 욕심이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를 잘 풀어나간 영화였어요.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고요. 그리고, 마지막의 충격적인 사건에 집중하면서도 그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을 담아내는 긴 롱테이크 장면은 깊은 여운에 잠기게 했네요.

 울리히 자이들의 파라다이스 3부작의 마지막인 <파라다이스: 호프>는 올해 부산에서 본 가장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자이들의 재치가 돋보이는 영화였는데 <파라다이스: 사랑>, <파라다이스: 믿음>처럼 공허한 여성의 삶은 잘 표현해냈으나 오스트리아의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보이질 않아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영화 부제인 '희망'에 걸맞게 전편들과는 달리 혼자가 아닌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희망찬 결말이 눈물을 핑 돌게 했습니다.

 두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지난 날>과 자파르 파나히의 <닫힌 커튼>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각각 전작인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를 정말 인상깊게 봤는데 (별거는 2010년대 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하고요.) <지난 날>의 경우엔 그 정교한 각본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아마드가 프랑스로 돌아와 마리-안으로부터 사정을 듣고, 사건을 파고드는 전반부는 좋았습니다만 후반부의 이야기는 당황스럽게 전개됐습니다. 결말은 과하고요. <닫힌 커튼>은 영화를 따로 놓고 보면 자파르 파나히의 상황이 절절하게 와닿을 정도로 인상깊은 영화지만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의 이야기, 방식(아이폰으로 촬영하고, 소재를 구상하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저한테는 그저 동어반복에 불과한 느낌입니다. 그렇지만 이웃을 통해 '지나간 일은 모두 추억이 될 것이다'라고 위로받는 장면은 뭉클하기도 했네요.

 베니스 영화제 경쟁작이었던 <아나 아라비아>, <질투>, <성스러운 도로>는 고르면서도 불안했던 작품인데 무난했습니다. <아나 아라비아>같은 경우에는 소품같단 생각이 들었는데 이야기 자체는 정말 진부하지만 80분 가량을 원테이크로 이어나간 아모스 기타이 감독의 용기엔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맙소사, 어떻게 이걸 찍었을까.' 싶었고요. <질투> 역시 소품같았어요. 적재적소에 사용된 아름다운 음악이 인상적이긴 했으나 역시 이야기가 너무 진부했어요. 영화제의 시놉시스처럼 배우의 삶과 아버지의 역할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연애에만 관심있는 남자의 이야기같았어요. <성스러운 도로>는 처음 로마시 외곽을 토성의 고리처럼 둘러싼 그라(GRA) 고속도로의 설명덕분에 기대했으나 엄청 지루했네요.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딱히 그 사람들이 다큐멘터리의 인터뷰어로 선정된 이유도 모르겠고요. 촬영은 몇 번 씩 인상적이었는데 편집이 엉망이었습니다. 산만하기 짝이 없어요. 도대체 뭐가 성스럽다는건지 알 수가 없고요. 그냥 "가지각색의 로마 사람들" 정도의 제목이 딱 적당했을 것 같아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선댄스영화제 초청작 세 편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데 <미래>는 환상적인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쭉 내리막을 걷는 영화입니다. 촬영은 지나치게 입힌 필터때문에 오버스럽기 짝이 없고, 이야기에선 딱히 비앙카의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내지 못해요. 결말은 또 너무 갑자기 정리하려고 하니 공감도 안 가고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지 않는 것들>은 무난했습니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라는 불평을 내뱉고 있었는데 그 말이 딱이예요. 많은 인물들을 정신없이 다루는데 적응이 잘 안 되는 느낌. 물론 다양한 인물들의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만들어내는 훌륭한 순간들(편의점 장면, 케이크를 나눠 먹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끔찍했습니다. 실제 오스카 그랜트가 억울하게 총살당한 그 사건 자체로도 충분히 안타깝고, 가슴 아픈데 그 이야기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이것저것 무리수를 덧붙였는데 형편없습니다. 딸과 부인은 이유없이 불안에 떨고, 20대 청년의 죽음을 암시하기 위해 죽어나가는 강아지의 모습은 너무 속보였고요. 또 뜬금없는 플래쉬백은 너무 얄팍합니다. 무엇보다 구린 부분은 오스카가 인물들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를 화면에 띄우는 방법이었는데 촌스럽기 짝이 없었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아, 이 이야기는 이렇게 다루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는 찝찝함만이 남습니다.

 <나와 엄마 이야기>는 남들이 규정하는 나와 내 자신이 선택하는 나 자신이 상충하며 이루어지는 재밌는 코미디 영화인데 결말이 너무 깼습니다. 연극 무대와 환상이 공존하는 배경과 주인공인 기욤 갈리엔의 1인 다역의 연기는 인상깊었습니다만 결말부엔 자의식 과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네요. 다이안 크루거는 또 왜 나온건지. 그리고, "남자들과 기욤, 저녁먹어!"라는 원제목이 좋은데 "나와 엄마 이야기"는 너무 진부한 선택인 것 같고요.

 올해 칸영화제에서 화제가 됐던 <헬리>는 들리던 악명에 비해 생각보다 심심한 영화였어요. 본격적인 사건이 터지고, 영화 속 광기의 시동이 걸리고부터 쭉 롤러코스터를 타길 바랐는데 롤러코스터가 아닌 자이로드롭을 탄 것 같더라고요. 오히려 1부격인 이야기가 지나고 2부가 시작되고는 너무 담담하고, 느릿느릿해서 지루했습니다. 물론 멕시코 현실을 영화로 투영한다는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요. 마지막으로 <그리그리>는 딱히 할 말이 없네요. 영화를 보는 100분이 너무 끔찍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5분 뒤부터 나가야하나 고민했는데 그 때 나갔어야 했어요. 버림받은 사람들이 공동체로 향하고, 공동체에서 그 인물들을 받아들이는 것 까진 좋았습니다만 영화가 오버를 합니다. 결말은 너무 유치하고, 장난스럽기 짝이 없어서 허탈했고요. 무엇보다 각본이 아주 별로였는데 "내가 당신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줄게." "나는 창녀야!" 뭐 이런 수준. 그리그리의 춤사위를 화려하게 담아낸 이미지를 영화가 쫓아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좋았던 연기들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 / 아델 이그자르코풀로스


숏텀 12 / 브리 라슨


프린스 아발란체 / 폴 러드


글로리아 / 파울리나 가르시아


숏텀 12 / 존 갤러거 주니어


폭력녀 / 테미스 파누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 / 레아 세두


떠돌이 개 / 리캉생


팔레르모의 결투 / 엘레나 코타


지난 날 / 폴린느 버렛


지난 날 / 알리 모사파


그랜드 센트럴 / 타하르 라힘


이다 / 아가타 쿨레샤


어느 남편의 부인 살리기 / 나지프 무이치


구원자 / 사라 세라이오코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에서 아델 이그자르코풀로스는 아델 그 자체였습니다. 친구는 아델의 진실성때문에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입니다.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게 얼굴을 붉히며 사랑에 빠진 소녀는 정말 사랑에 빠진 것 같았고, 성정체성의 고민은 저에게도 너무나도 가깝게 다가왔으며 슬픔에 잠겨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오열하던 모습은 정말 저 소녀를 안아주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덧붙여 그런 아델의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파란 머리의 엠마, 레아 세두도 아델의 좋은 파트너였어요. 

 <숏텀 12>에서 자신 역시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아이들만큼은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브리 라슨 역시 훌륭했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였어요. 물론 그런 자연스러운 역에는 특별히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숨 쉬며 좋은 파트너가 되어준 존 갤러거 주니어의 몫도 컸습니다. 어디 갈 곳 하나 없이 외로운 청년 앨빈을 연기한 폴 러드는 그 동안 해왔던 코미디 연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름 모를 여자를 만나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 슬픔에 잠기는 모습이나, 이제는 빈 공터가 되어버린 텅 빈 공간을 집처럼 생각하며 가장 노릇을 하는 모습은 진정성넘치는 연기였습니다.

 <글로리아>의 파울리나 가르시아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50대 중년의 공허함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는데 정말 감정이 터져나올 법한 장면에서 절제하며 감정을 숨기는 모습이 아주 좋았습니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각각 남녀연기상을 수상한 테미스 파누엘레나 코타는 의외였어요. 테미스 파누는 다정한 얼굴속에서 추악한 본성을 살며시 드러내는데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서의 연기는 정말 감탄스러웠고요. 엘레나 코타같은 경우엔 다 합쳐서 대사가 열 마디 가량 되는 적은 대사에도 불구하고, 이 노파의 삶과 성격을 관객에게 절실히 전해준 것 같아서 감탄스러웠어요. 둘 다 '연기상'이 요구하는 보여지기 식의 연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기상을 안겨준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물론 황금 사자상은 불만이긴 하지만요.)

 지독한 롱테이크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한 남자, 리캉생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비바람을 맞으며 광고판을 들고, 노래를 흥얼대는 장면. 그리고 (문제의) 11분간 양배추를 뜯어먹는 장면에서의 연기는 굉장히 원시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정이 합쳐져 먹먹한 감정에 이르게 합니다. <지난 날>로 여자연기상을 수상한 배우는 베레니스 베조였지만 전 베조보다는 알리 모사파폴린느 버렛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폴린느 버렛이 연기한 루시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엄마의 행복을 방해하고, 또 그로 인해 저지른 일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그 다양한 감정을 무리없이 이끌어냈고요. 반면 알리 모사파는 자상한 아버지와 비밀을 숨긴 남자 두 가지 모습을 통해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미스테리를 제공합니다.

 <그랜드 센트럴>에서 단벌신사로 등장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 타하르 라힘도 좋았습니다. 카롤과 사랑에 빠지면서 카롤에 집착하고, 그 만큼 방사능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이 설득력있었어요. <이다>의 아가타 쿨레샤는 그야말로 관록이 느껴지는 연기였어요. 사건에 집착하고, 그 사건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슬픔에 잠기는 모습, 그리고 그 실상에 대한 선택까지 몰아치는 감정을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나지프 무이치의 연기는 말 그대로 사실성에 입각한 연기였는데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나지프가 애원하는 장면에선 저까지 눈물이 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라 세라이오코는 시각장애인/비장애인을 동시에 연기해야 해서 까다로웠을텐데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리타와 앞이 보일 때의 리타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좋았습니다. 또, 금세 부서질 듯한 연약함에서 결국 강인한 모습을 내비칠 때도 아주 훌륭했어요. 미묘한 차이를 요구하는 배역이었는데 소화를 아주 잘했고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그랜드 센트럴의 감독 레베카 즐로토브스키


아나 아라비아의 감독 아모스 기타이


물오리의 감독 야니스 사카리디스


구원자의 감독 파비오 그라사도니아와 안토니오 피아자


이다의 감독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팔레르모의 결투의 배우 엘레나 코타

 사실은 영화제나 시네마톡같은 GV(관객과의 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저 자신도 모르게 그 대답에만 맞춰서 영화를 바라볼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평소 좋아하는 감독(파벨 파블리코브스키)의 내한 소식도 듣고, 또 제 자신의 편견을 떨쳐내기 위해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해보았습니다.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관객들의 생각을 듣고, 감독/배우들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네요. 그동안 왜 이런 시간을 날려버렸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보람찬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모스 기타이 감독의 삶의 철학을 엿듣고, 영화를 몇 편 찍지 않은 감독들의 포부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나중에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부산을 찾아 새로운 영화와 사람들을 또 만나고 싶네요.



 약 일주일 이상 영화제에 있다보니 좋은 영화들을 단기간동안 만날 수 있어 기쁜 감정과 육체적·정신적인 피로가 동시에 찾아오네요. 영화제를 돌이켜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팔레르모의 결투를 보기 전에 우연히 소향뮤지컬센터 앞 벤치에 앉아 홀로 담배를 피우던 엘레나 코타를 만난 기억입니다. 싸인을 받고, 저도 혹시 옆에 앉아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Si."라고 대답해 대화를 나눈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덕분에 앞으로 저는 베니스 영화제 수상자와 함께 담배를 피운 적이 있다. 라는 자랑거리가 생겼고요. 어쨌든 부산에 다녀오신 모든 분들 부산에서 좋은 경험하시고 가셨길 바라고, 또 내년 부산도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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