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아프셨던 아빠

2013.10.31 11:30

여름숲 조회 수:3091

1.

저 아래 회사 직원의 아버지가 10년 병치레를 마감하시고 가셨다는 글을 보니..저도 저희 아빠 보내드리던 생각이 나서 몇글자 써봅니다.

벌써 2년이 다되어 가네요.

아빠도 5년을 아프셨어요.

조기위암이라 진단이 나와  내시경을 통한 간단한 수술로 해결될 줄 알았던 것이 수술로 이어지고, 수술 후 또 염증발생으로 거의 두달을 물 한모금 못드시고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을 견뎌내셨고

퇴원 후 즉시 항암치료..

일년반 후 재발

이후 계속되는 항암치료- 정맥주사, 경구투약, 토모테라피, 일반 방사선 치료, 할 수 있는 것들은 다해봤지요.

그리고 2년 전 여름 주치의가 치료를 포기하고 초겨울 돌아가실 때까지 통증케어밖에 없었지만 일정 정도의 통증을 벗어나니 집에서는 감당이 되지 않더군요.

통증 완화 패치를 온 등에 빈틈이 없도록 빼곡히 붙이고, 보통사람은 반알만 먹어도 정신이 혼미해질만한 강력한 진통제를 수시로 한주먹씩 드시고, 몰핀을 링거에 섞어 맞고 계셔도 순간적인 통증이 올때는 추가로 또 진통제를 맞으셔야만 했고, 밤이면 강력한 수면제 없이는 두시간도 수면이 불가능한 시간을 보냈어요.

나중에는 제발 이제는 나를 보내달라셨지만 오빠도 저도 그 눈길을 외면할 수 밖에 없었어요. 자식으로서 차마 그 손을 놓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니 더 적극적으로 아빠의 남은 삶을 연장하기 위한 노력을 했어요.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렸어야 맞는게 아닌가 싶지만, 그 당시는 그날그날의 혈액검사 수치가 조금만 안좋아도, 식사량이 조금만 떨어져도,  알부민이다 뭐다 영양제를 놔달라고 주치의나 레지던트를 붙잡고 늘어졌었죠.

위암이 폐로 전이되고 나중에는 뼈까지 전이되는 극심한 고통속에서 마지막에는 폐렴이 와서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 와중에도 아빠는 끝까지 정신을 놓치지 않으셨고 신변 청결 또한 철저하셨죠. 그래서 더욱 더 우리 가족들은 아빠가 그리 급하게 가실거라 생각을 못했던 거 같아요. 전날까지 또렷하게 계시다가 다음날 그리되셨으니...

 

2.

아빠가 가시고 아빠 지인들께 부고를 전해야 했습니다.

일견 예견되어 있었기에 아빠 수첩을 받아 연락처를 모두 미리 엑셀에 정리를 해두었던걸 출력해 전화를 돌렸어요.

거의 모든 전화번호가 011, 017, 018, 019 로 시작되고 있었고

70%이상의 전화가 결번이거나 명의가 바뀌어 있었어요.

아빠가 아프시기 전까지는 꾸준히 사회활동을 하고 계시고 인맥이 제법 넓었었는데 5년이 채 안되는 투병기간 동안 주변의 사람은 거의 떨어져 나가고

동창과 오랜 친구, 한동네에 오래 거주했기에 동네분들만 남아있더군요.

다행히 오빠와 제가 장성해서 각자의 직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기에 장례식장은 정신없이 북적거렸죠.

그런 북적거림 속에 아빠 잃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뭉쳐두고 있을 수 있었던거 같네요. 어쨌든 해내야 하니까요. 엄마는 거의 실신 지경이고 오빠도 문상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었고, 저도 제 문상객을 맞으면서 또 어찌되었던 이틀간의 살림을 꾸려내야 했으니까요..

 

3.

오랜 아빠의 투병 끝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몇몇 있습니다.

큰 수술을 하고 난 후 환자 본인도 가족들도 정신이 없을 때 오지 말래도 부득불 찾아오시던 아빠의 지인들.. - 이후 예의상의 전화도 없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병문안..그거 본인이 원치 않으면 엄청난 민폐이니..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펑펑 내려 저도 병원을 들러 일찍 집으로 나선 날

제가 병원에 없었는데도 겨울철 귀했던 고급과일 들을 한아름 챙겨서 찾아와 엄마와 아빠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갔던 친구

 

그리고..마지막으로..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날 문병을 왔던 대학 선배..

제법 멀리살던 선배인데 마치 이웃동네 놀러오듯 그냥 보고 싶어서 왔다며 와서 너만 봐도 되고 아빠가 허락하시면 아빠 뵙고 가겠다고 조심스레 물어보던 선배..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아빠를 뵈었던 사람이예요.

그리고 직장이 있었는데도 이틀 밤을 함께 지세워주었고요.

겨울 북해도 여행을 다녀와서.. 그냥 생각나서 샀어 아빠 가져다 드려~~ 하며 타르트를 한통 쑥 내밀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평생을 두고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될 거 같네요.

 

4. 마지막으로....

오늘이 제가 지금 회사에서 일한지 만으로 14년 되는 날입니다.

오늘 밤 조촐히 자축파티라도 할까합니다..

그 파티는 두산의 코시우승 파티를 겸하리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1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24
1500 게시판 재개장(?)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1] chobo 2014.01.27 807
1499 [스포일러] 오늘 더 지니어스 간단 잡담 [8] 로이배티 2014.01.26 2422
1498 1월에 올리는 마지막 아가씨 사진(구체관절인형 바낭) [2] 샌드맨 2014.01.25 1261
1497 어익후 반갑습니다 [9] 로이배티 2014.01.23 1331
1496 카이주는 실존하는 거였군요... [17] Kovacs 2013.11.20 5058
1495 Winter is Coming... (구체관절인형 바낭, 13금 쯤?) [4] Kovacs 2013.11.19 1400
1494 뒤늦게 본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스포 많아요) + 올라 피츠제럴드에 대해 아시는 분 있나요? [6] 사소 2013.11.17 1989
1493 연예인 도박 전말 - 역시 정론직필 디스패치 [6] 룽게 2013.11.12 5004
1492 로봇 수술에 관한 질문입니다. [5] chobo 2013.11.11 1368
1491 [바낭] 이 주의 아이돌 잡담 [13] 로이배티 2013.11.10 3231
1490 질문) 포셀린으로 씌운 앞니 끝이 떨어졌는데요... [1] pennylane 2013.11.07 1057
1489 리부트 될까 싶은 시리즈 [31] 사소 2013.11.05 2723
1488 [도와주세요] 할머니 역할한 남자배우 [14] james 2013.11.01 2298
1487 [축구바낭: 리뷰] 미국 메이저리그 축구 서부리그 플레이오프: 시애틀 사운더스 vs. 콜로라도 래피즈 [4] 푸네스 2013.10.31 1825
» 오래 아프셨던 아빠 [13] 여름숲 2013.10.31 3091
1485 영화 그래비티 궁금한 점 하나.....(아마도 스포...) [8] 보람이 2013.10.31 2560
1484 캡틴 하록 팬들 지금 잠이 오십니까? [18] Kovacs 2013.10.30 4433
1483 12월 28일 토요일 예술의 전당 서울시향 <합창> 공연 추가 오픈. [7] aires 2013.10.29 1254
1482 [바낭] 이 주의 아이돌 잡담 [12] 로이배티 2013.10.27 2941
1481 제2의 싸이라는 Ylvis의 The Fox (여우는 뭐라고 말하는가?) 중력으로 가득 찬 우주듀게에 지구생태계를!! [7] 비밀의 청춘 2013.10.26 203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