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08 01:20
그 시절 우리 집에 있던 '골드스타' 테레비를 돌리면 채널이 네 개밖에 없었다.
서울은 미군방송까지 다섯 개라고 했다. 어쨌든 아홉시 뉴스에 전두환이 안 나오면 방송사고였다.
촌동네였지만 소위 국토종합개발이 거의 막바지 단계였고 좀 살만해진 때라고 기억된다.
논두렁에 용두레가 거의 사라지고, 서수남 하청일이 선전하는 한일 자동펌프가 들어왔다.
집집마다 있는 건 아니었어서 동사(마을회관)에다 갖다놓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썼다.
알전구가 사라지고 형광등이 들어오며 컬러 테레비와 흑백 테레비가 집마다 한 4:1 비율로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반에 좀 잘사는 집
애들은 "우리집에 <삼성 핼리 비디오 샀다>라고 자랑을 했다.
핼리 - 당시에 핼리혜성이 지구에 접근한다고 삼성에서 붙인 상품명이었다.
자랑한 걔 이름은 기억 안 난다. 그러면 저기 옆에 "지도위원" 황민구가 이죽거린다.
"우리집은 금성 테레비다!"
"그기 와?"
"리모콘도 있다!"
"우와~"
그래서, 학교 파하고 다들 글마 집으로 몰려가서 테레비를 봤다.
이 테레비는 손잡이 틀어서 돌리는 게 아니네? 채널이 버튼이네?!
(그래봐야 나오는 채널은 여전히 네 개. MBC, KBS1, KBS2, KBS3.)
우리 집은 손으로 돌리는 테레비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네 발 달리고 미닫이 서랍 있는 성보네 집 테레비가 더 멋져 보였다. 흑백이었지만.
성보 말로는 자기네 아버지가 첫 월급 타서 그걸 이고 논두렁 이십리 길을 걸어 왔더랬다.
어쨌든 우리는 백로가 훨훨 날아다니는 논두렁을 넘고 철뚝을 지나 읍내에 있는 그놈 집에서 "고라이온" 비디오를 보다가
(이 때
주인공 다섯 대원 중 하나가 죽고, 공주가 네번째 멤버로 새로 들어왔다. 그가 죽던 날 읍내 태권도장이 완전 초상집이었다...)
다섯시 반에 KBS에서
"율리시즈" 틀어줄 때쯤 집으로 돌아갔다. 해가 까빡 지면 공동묘지랑 살쾡이가 무서웠기에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써머 타임"을 실시한 덕분에 눈에 불 켠 삵을 만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서울로 가는 일곱시 발 통일호 특급 순환열차는 해 지기 전에 역을 지나갔다.
통일호는 특급이라서 비둘기호에서 쓰던 에드몬슨 마분지 승차권이 아니라 전산발매권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린 눈에는 흔히 보던 등사인쇄가
아니라 역무실 도트 프린터에서 시끄럽게 찌익 찌익 하고 찍혀나오던 차표가 참 신기했었다.
마분지 승차권은 역무원 아재가 가위로 째깍 하고 귀퉁이를 잘라내 준다. 그걸로 반 객차 반 화차인 비둘기호를 탔었다.
통일호는 특급이었다. 비둘기호와 별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전철 모양의 긴 의자가
아닌, 무궁화 특급처럼 4인1조로 마주보게 된
크로스 시트였고 무엇보다도 2호차가 금연차였다. (동네 의원부터 학교 숙직실까지 재떨이 없는 곳 찾기가 힘들던 시절.)
항상 감기 때문에 외할매 손을 잡고 마산 김소아과까지
왔다갔다했기에 금연차는 참 반가웠다.
사실 나같은 촌놈 얼라가 대처까지 나갈 이유는 병원밖에 없었다.
(주사가 왜
그리 무섭던지!)
그렇기에 병원행이 아닌, 유치원 선생님 - 학교 병설유치원은 선생님들이 유치부도 담당했음 - 이
당일치기로 기차타고 도시로 나가서, 지금은 사라진 경양식집 '맘모스'에서 돈까스 사 주었을 때가
기억에 그리 오래 남는 거였겠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맞선 자리였던 듯싶다.
얼마 후 조 선생님 결혼하셨으니까. 어쩌면 선생님은 그 자리 거절하려고 나 데려갔던 게 아닐까? ㅋㅋ
(하지만 결국 결혼하셨고.... 십 몇년 지나 다시 뵈었을 때는 그 처녀 선생님이 와 그리 아줌마가 됐드노.)
도시에서 다시 촌으로 돌아오는 길은 대개 시외 터미널에서 타는 빨간 완행 시외버스였다.
드럼통 두들겨서 만든 빨간 버스는 앞쪽에 안내양 타는
부분이 불룩하게 나와있었다.
비포장길을 털털털 달려서 고개를 힘겹게 넘어 한 시간 반쯤 달리면 우리 동네에 닿았다.
비둘기호는
그거보다 조금 빠르게, 정확히 42분이 걸렸다. 가끔 녹색으로 칠한 버스는
<고속도직행>이라고 써 놓고, 읍내 들렀다가 바로 고속도로로 빠졌다.
당시에는
산인역 쯤에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평면교차로가 있었다.
(당시 남해고속도로는 광주까지 2차선이었고 산인, 곤양, 곡성 즈음에 고속도로와 일반도로가 만났다)
녹색버스는
그만큼 빨랐다.
외할매는 항상 나 데리고 다니면서 버스 기사와 실랑이를 벌였다.
"할매 야가 어디를 봐서 여섯살이란
말잉교"
"여섯살 맞응께네 아덜 요금 받으소"
결국 버스기사 아저씨는 실랑이를 포기하고 미취학 아동요금을 할매 버스 삯에 얹어 받았다.
- 2005년도에 군복학하기 전에 놀면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외할매 집도 안 들리고 옛 고향마을을 다녀왔었다.
그 때, 내가
얼마나 어렸던가 하는 걸 새삼 다시 깨달았달까.
읍내 태권도장에서 종종걸음으로 집에 가던 그 먼 길이, 어른 걸음으로는 20분도 안
지나 논두렁길이 끝나고 학교가 나왔고,
한때 내가 자전거째로 빠져 죽을 뻔했던 깊은 도랑은 그냥 농지용 용수로 개울이었다.
다만 백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긴 목을 구부정하게 접었다 폈다 하면서 우아하게 미꾸라지 식사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