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 아르메니아로 출장을 다녀 왔습니다. 출장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만 그 성공을 끌어내기 까지의 과정이 쉽지 않아서 였던지 다녀오고 나니 좀 아프더군요. 그래서 하루 연차 내고 쉬고 있는 중입니다.

 

1. 출장지 까지의 직항이 없어서 모스크바를 경유해서 다녀와야 했습니다. 출장일정을 급하게 잡게 되어서 표가 없다보니 저렴한 가격의 러시아 항공사를 이용하게 되었는데요. 분명 거리는 국제선 거리인데 (인천 - 모스크바 약 9시간 정도 걸렸던거 같습니다) 비행기의 크기나 서비스의 질은 마치 미국의 국내선을 타는 기분이었어요. 주스와 콜라 그리고 물 밖에 없는 (물도 스파클링 워터는 없고 그냥 생수만) 음료 리스트, 무뚝뚝하다 못해 살짝 강압스러워 보였던 터프한 러시안 스튜어디스, 자고 있는데도 굳이 깨워서 먹이를 주시던 과도한 친절 (터프한 스튜어디스 분께서 불쑥 기내식을 들이 미시는데 왠지 안 먹으면 안 될거 같았지요). 국제선이면 이제는 대부분 있는 (적어도 장거리 라인에는) 승객 전용의 티비도 없는데다가 기체가 작아서 그런지 가는 동안 난기류로 인한 흔들거림도 꽤 자주 있었답니다.

 

그래도 나름 인상적인 순간들도 있었지요. 러시아 액샌트 가득한 한국말로 기내 방송을 해 주신 러시안 기장님이 그 첫번째 순간을 마련해 주셨어요. 러시아 액샌트의 영어는 많이 들어봤지만 한국말은 처음이라 상당히 인상 깊더군요. 그냥 적어서 말씀하시는 걸까? 생각했었는데 난기류 때문에 기내가 흔들거릴때 '염려말라'며 다시 방송을 해 주시는걸 보니 한국말을 제법 익히신 분 같았어요.

 

모스크바에 비행기가 착륙을 할 때도 역시 다른 항공기들이 착륙할 때 보다는 좀 더 덜컹거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뭐, 정말 제 기분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바퀴가 지면에 닿고 성공적인 착륙임이 확실해 지자 기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박수가요... 주로 러시아 승객들이 치는거 같았는데. 이게 그냥 기장과 crew의 수고에 감사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일종의 전통(?)인 건지 아니면 '이 항공사를 이용하고도 무사히 도착했어' 하는 안도의 의미인건지 모르겠더군요. 출장지에 도착해서 현지 파트너들과 저녁 식사할 때 타고왔던 러시아 항공사의 이름을 말하니 모두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 걸로 봐서는 왠지 두번째의 이유에 더 힘이 실리기는 했지만요...

 

2. '카페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면 옆자리의 아가씨가 말을 걸어온다' 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우스개로 하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아이패드가 확실히 좋은 ice breaker이긴 한거 같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패드를 꺼내드니 옆자리에 계신 분이 정말로 말을 걸어 오시더군요. 덕분에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돌아오는 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덕분에 원래 기내에서 읽을 생각으로 받아두었던 노인의 전쟁은 초반부 조금 밖에 읽지를 못했군요.

 

3. 인천공항을 나와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외국인이 말을 걸어 왔습니다. 나이가 조금 있어보이는(50대?) 남자였지요. 서울대학병원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묻더군요. 마침 제가 기다리는 버스가 혜화에 가는 버스이기에 이걸 타고 혜화에 내려서 5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말해 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말이 자기가 상한 음식을 먹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태라 5분이나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한국은 처음 와봐서 잘 찾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울상을 짓는 거였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아프기 까지 하니 얼마나 심정이 끔찍할까 싶어서 어차피 집으로 가는 길 쪽이니 같이 병원까지 가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버스에 탔죠.

 

버스에 타자마자 그 외국인은 고민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병원 갔다가 호텔은 어떻게 잡아야 하나, 원래 한국은 경유지고 내일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과연 자기가 혼자서 다시 공항으로 올 수 있을까를 고민하더니 내리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말렸지만 자긴 꼭 내일 비행기를 타야한다며 결국 다음 정류장 (인천 공항내의 2번째 정류장)에서 내렸.. 다가 갑자기 다시 올라오며 저를 보고는 외쳤어요.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시점에서 버스 운전사님도 슬슬 열받기 시작)

 

뭔가 이상한 사람한테 말렸다는 기분이 슬슬 들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말 해 줬습니다. '당신은 지금 몸이 너무 아파서 판단이 제대로 안 서는 상황이니  내 말을 들어라. 당신 말대로 라면 지금 당신은 water poisoning 인 상태고, 그럼 당연히 의사한테 보여야 한다. 공항 의사는 못 믿겠다고 했으니 (저 남자가 이 말 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내가 서울대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그 병원 가면 당신같은 외국인을 담당하는 영어 가능한 스텝이 있을테니 상황을 얘기 해서 호텔을 잡는 것도 도와줄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호텔 스텝들이 당신이 내일 공항으로 돌아올 차 편은 알아봐 줄거다. 그러니 그만 칭얼대고 버스에 타셈 -ㅅ-'

 

다시 버스에 탔고, 버스는 공항을 떠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버스 상태가 살짝 안좋았는지 기사님이 엑셀을 밟을 때 마다 매끄럽게 달리지 않고 살짝 속도가 빨라졌다 다시 느려진달까.. 그런 덜컹거림이 미묘하게 느껴지더군요. 아 물론 제가 느낀게 아니고 이 외국남자가 먼저 느끼고는 저에게 말을 해 줬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그렇기는 했어요. 하지만 뭐 어쩌라구 하는데 이 남자는 그 느낌을 정말 끔찍하게 못 참는 거였지요. 버스가 이상한거 아니냐, 이러다 무슨 일 나면 어떻하냐, 기사에게 이렇게 달리지 말라고 할 수 없느냐, 왜 다른 승객들은 항의를 안 하느냐, 한국의 기술은 이런 버스가 그냥 길에 다니게 놔 둘 정도냐, 이건 거의 인도(india) 수준 아니냐 등등등...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갈 수 없다며 기사님께 얘기 해서 버스를 세울 수 없냐고 하더군요. 그냥 다시 공항으로 가겠다며. 어이 이봐요 여긴 지금 고속도로 한 가운데라고 -ㅅ-;;;

 

이 시점에서 제 인내심은 바닥을 쳤고, 그 남자와 저는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서면 공항으로 돌아가는 가는 버스 타는 곳을 알려주기로 타협을 봤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천공항을 떠나고 나면 두번째 정류장은 마포라는 거고 그 때까지는 적어도 3~40 분이 남았다는 거였죠. OTL

 

이 망할놈의 아픈건-참-안됐지만-성격은-정말-못-참아-주겠-는 외국남자의 온갖 걱정을 (이제 water poisioning 보다는 버스에 대한 걱정이 더 커진) 듣는 고문을 당하는 중에 아내가 전화를 했습니다. 핸드폰을 꺼내서 받는데 갑자기 이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거에요! 이 인간 결국 못 참고 버스에서 뛰어 내리기라도 할 건가 싶어져서 전화를 끊고 남자의 팔을 잡고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나 핸드폰 알러지 있거든. 너 전화 끝날때 까지 여기 서있다가 앉을께'

 

.........

 

핸드폰 알러지라니 나.. 난생 처음 들어봐... 전파에 알러지가 있는건가효? 라고 묻자 'yes, I'm allergic to radiation of the mobile' 이라는 대답을.. 아 이거 정말 있는 거에요? 궁금해졌...

 

어쨌든 버스가 겨우 마포에 도착했고 저는 길 건너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을 알려 주고는 그 외국인과 작별 했습니다. 아프긴 정말 아파 보였는데 목적지 까지 잘 갔기를 바랍니다.

 

다시 버스에 오르니 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 두 명이 제게 자신들의 버스 티켓을 보여 주며 묻더군요. '여기 가려면 몇 정거장 남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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