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아침에 정신이 좀 맑아지라고 명상(이라고 쓰고 침대에 머리묻고 파묻기라고 읽는다)을 하다 보면 

전혀 엉뚱한 깨달음-_-을 얻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개중에 오늘 아침 문득 알게 된 것 :


1.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는 '괭이'를 좀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낫이나 보습(이거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아마 실물은 못 봤을 듯)같은 농기구의 그 괭이.


이걸 "호파깽이" 라고 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괭이를 가리키는 사투리 중에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번뜩하는 생각.

혹시 호파깽이가 아니라 "호퍼" 괭이가 아니었을지. (....)

이를테면 "콘크리트 다리"가 "공궐"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안도현 시인 수필집에도 나오는 얘기. 공굴다리라는 말은 지역을 안 가리고 꽤 여러 곳에서 보이는 것 같다.

아마도 안도현님 말대로 콘크리트의 일본식 표기가 남은 것 같다. 시다바리, 스메끼리, 찌께다시, 그리고 다찌마와리.


- 근데 왜 호퍼-_-일까? 네이버 영어사전에 혹시나 해서 두들겨 보니까 Hopper는 깔때기라는 뜻이랜다.

(나중에 누군가의 어린이용 영어 교재에서 괭이를 영어로 "hoe"라고 써 놓은 걸 보긴 했지만. )


여기서 인문학적 상상력. 혹시 호파깽이가 아니라 "흙파괭이"가 아니었을까.(...) 

실제 발음은 "혹파깽이" 비슷하게 나니까 말이다. "거 논두렁에다가 혹파깽이 좀 갖다 나라." 하는 식.

(면사무소가 있는 중암리 장터 말고, '월촌'이니 '모로실'이니 '붕듸미'니 하는 구석배기 동네 가면 아직도 저 말을 쓰고 있다.)



2.

원래는 이 생각의 실마리를 이어 가서 이리저리 물때처럼 입버릇에 끼어 있는 

촌동네 외래어들을 좀 정리해볼까 했는데, 대전제부터 확실하지 않으니 어째 김이 샌다.(....) 

걍 외래어건 아니건, 지금은 가물거리는 몇 가지 단어들만 얘기해 보면.


- 제무시 : GMC - 제너럴모터스에서 나온 트럭이다. 

군대에서 쓰는 두돈반 트럭이랑 닮았는데 크기는 육공트럭만하다.

승용차마냥 엔진 룸(보닛)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고, 내 기억에는 촌스러운 시퍼런 도색을 하고 다녔던 것 같다.

힘이 좋아서 버스도 못 올라가는 임로(林路)도 잘 올라다녔다. 88올림픽 즈음해서 그 이후로는 못 본 듯하다.



- 나가시 : 시외 경계를 넘나드는 택시를 이렇게 불렀다.


지금처럼 촌동네에 공장이니 뭐니 안 들어오고 촌은 촌이요 도시는 도시던 시절. 대략 창원시가 의창군과 창원시로 나뉘어 있던.

지금은 서울역에서 신림동 오는 데 할증 붙여서 기본 2만원은 깨질 생각 해야 하지만 그 시절은 생각보다 택시요금이 쌌던 걸로 기억한다.

 (작은 외숙부님 개인택시 근속 50주년... 부산역에서 범일동까지 5천원에 모십니다....)  


외할머니 손 잡고 마산 나갔다가 기차나 버스시간이 안 맞으면 택시를 타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도시 역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순환열차 놓치면, 기차가 끊긴다. 순환열차는 2호차가 금연차인 고급 특급.

(지금은 없어진 통일호가 그 당시 특급이고, 무궁화호가 그 윗단계였다. 새마을호는 부산에만 다녔다.

점심 때에는 반화반객이라고 해서, 비둘기호 객차가 앞에 세 개, 뒤에는 화물차 세 개 달고 다니던 그런 게 있던 시절..)

어쨌거나 

당시 특급이라고 부르던 그 순환열차 - 서울에서 내려와서 마산 찍고 진주 순천 지나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 통일호는  2천원, 

택시도 마산에서 함안 지나 우리 동네까지 단돈 삼천원.

지금은 마산역에서 훨씬 가까운 진해까지 가는데 오밤중 기본 대절이 만팔천원 받으니 참 격세지감이다. 


 여튼 그 택시를 '나가시' 라고 따로 불렀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 북마산 '영남주차장'에서는 항상 나가시가 서너 대쯤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 택시만 '나가시'라고 부르는지 어린 마음에 참 궁금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일곱 살의 내가 내린 결론. 


"시/군 경계 밖으로 나가는 택시를 줄여서, 나가시." (.....)


추가.

나가시의 어원이 일본어 '나라시'이고, 다른 지역에서는 전부 그렇게 불렀다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21세기가 되고 나서 서울 올라왔을 때였다. 



덧.

이왕 촌 얘기 하는 김에, 봄 즈음되면 보이는 농촌 풍경들.


- 보습 : 쟁기날이라고도 한다. 

황소가 끄는 쟁기는 보통 나무로 만들게 마련이고 쇠로 된 날이 안 달려 있으면 땅이 잘 안 갈아질 뿐더러 

심지어는 쟁기가 부러질 수도 있다. 그래서 쇠로 된 날을 다는 것. 


그런데 이미 80년대쯤 되면 평지 논에는 양수기와 트랙터가 들어와 있었기에 나도 자주 보지는 못했다. 

나무 쟁기는 저기 고개 넘어가는 '새동네'나 '오곡' 밑쯤 다락논에 가야 있었다. 

대부분 밭갈이는 경운기 앞대가리 분리해놓고 거기에 로타리 날 달아서 썼다.


경운기는 참 만능 도구였다. 

뒤에 수레를 달아서 뭔가 잔뜩 싣고 다녔고, 앞을 분리해서 로터리를 달아 밭을 갈았다.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대면 또 경운기로 모를 심을 수도 있다. 

물론 모판을 얹고 이앙기 옵션을 달아야 하지만 어차피 생김새는 똑같다.

심지어 농약살포기의 원동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때는 엔진 위에 뭔가 공상과학영화에서 보일 법한 조그만 탱크 장치를 하나 다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동네 황소는 개울가에 드문드문 있었는데 농사도 안 짓는 황소 어디에 썼던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소를 방목하는 풍경 자체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촌에 내려가 보면 우사(牛舍)는 동네마다 가끔 보이는데 대부분 육고기용 소가 아닐까 싶다. 







뭔가 쫌 아는 김제동의 한마디와 김수로의 어시스트.(.....) 

개인적으로는 참 끄덕거리며 봤던 기억이.... (근데 어린애 힘으로 시동핸들이 돌아가나? 쿨럭) 



- 그런데, 

대개 트랙터가 들어올 정도로 큰 논에는 

4월쯤 되면 파종하기 전에 "똥차"가 와서 인분을 잔뜩 풀어놓는다.

동네 전체가 문자 그대로 똥바다가 된다.

(진짜로 온 들판에 똥물이 찰랑찰랑 한다.) 


호랑이 담배 끊던 시절 얘기다. 

지금은 당연히 환경보호 관련 법제가 강화되어 있어서 불법이다. 

그런데, 이건 그 당시에도 불법이었던 것 같다. 


신창리 동네 어느 화장실을 푸면서 그 때 인부들이 하던 얘기가 기억에 있는데, 대충 내용이 이렇다. 



"아지매요 안 된단께네"


"아 와? 다른 똥꾼들은 잘만 논에다가 다 풀어 주드만 뭐 짜다라 해샀는다고. 좀 거름으로 치주소."


"아 그거는 의령놈의 새끼들이 뭐 몰르고 돈독만 마 올라갖고 그래샀는기라. 은자 법이 바뀌갖고 그래 카면 벌금 묵고 잡히가요.

정미소 조사장맨키로 삼청교육대 끌려가고 싶잖으면 안된다카이. 함안 읍내 천지바닥에 은자 그런데 없으요."


- 나중에 장터 갔다가 우연히 주워 듣기로는 이 얘기가 의령똥차 귀에 들어가서

함안똥차랑 의령똥차 둘이 장터 바닥에서 치고받고 싸웠던가 어쨌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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