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 잡담

2010.09.22 01:28

귀검사 조회 수:2961

시라노를 볼까 무적자를 볼까 고민을 하다가 시라노를 봣지만

갑자기 영웅본색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영웅본색은 제가 데뷰작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는 아니지만 제 인생의 영화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남들이 물었을때도 한 3년전부터는 스스럼없이 그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74년생인데 한창 영웅본색 열풍이 불었을 때는 극장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별로 영화에 관심도 없을 때라 일년에 극장을 한두번 갈 때였죠

당시는 저는 친형과 사촌형이 둘 다 대학생에 같이 방을 쓸 때였는데 어느날 두 형이 극장에서 영웅본색을 보고 와서는

잠자리에서 그 영화 얘기를 하면서 좋아 죽는 걸 봤습니다.

궁금해진 저는 어느 토요일 오후 노선이 무지하게 긴 버스를 타고 서울시내를 돌면서 영웅본색 1-2를 동시상영하는 극장을 찾아서 돌고 돌았습니다.

아마도 계기는 나는 잘 모르는 형들의 알 수 없는 세계에 동참하고 싶은 게 그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영등포의 어느 삼류극장에서 영웅본색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한 10번 정도는 본 것 같은데 항상 제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정해져 있습니다.

감옥에서 출소한 적룡이 택시 운전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어느날 다리를 절뚝이는 주윤발이 차 유리창을 닦으면서 이자웅한테 돈 몇푼을 건네받고

우걱우것 밥을 쳐먹고 있는데 적룡이 등장합니다.

목이 푹 잠겨서 편지엔 이런 얘기 안 했잖아 라고 주윤발에게 말하죠, 그럼 뭐 저는 그 다음부터 눈물범벅이 되는 거죠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엔딩의 모터보트 돌리는 주윤발 장면은 그렇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기억나는 건 오직 그 장면이죠

아마도 영웅본색이 제 인생의 영화라고 하는 건 그 장면을 비롯한 당시 유행한 홍콩느와르영화의 몇몇 장면들 때문입니다.

열혈남아에서 장학우가 어머니집을 찾아왔다가 유덕화를 만나서 도망치다가 잡혀서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말란 말이야라고 얘기하는 그 장면

천장지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유덕화가 오맹달을 괴롭히는 악당들을 박살내고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말하면서 집으로 갔다가 오청련을 만나서

정돈된 건 싫어라며 땡깡피우는 그 장면, 그리고 앞서 애기한 영웅본색의 그 장면이 제 인생의 영화들인 셈이죠

 

물론 좀 더 감상적인 기억도 있습니다.

서울극장에서 일요일 밤에 첩혈쌍웅을 혼자서 보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극장을 나서는데 이름모를 한 아저씨가 괜히 저한테 오뎅을 사주면서

'학생 이게 영화야 그렇지' 라고 반쯤 술주정하시던 그 모습도 기억납니다.

 

유하감독의 비열한 거리라는 영화는 당시 홍콩느와를에 열광했던 감독의 사전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의 자전적인 영화일텐데 그 영화의

원제는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이란 제목이다고 합니다.

비루한 것들의 카니발, 아마도 제가 앞서 얘기한 그 세 장면의 정서를 압축하는 굉장히 적확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제가 영웅본색류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겠죠

 

저 옛날의 필름느와르나 아메리칸 뉴시네마 시대의 갱영화들, 청춘영화들은 좀 더 절제되어 있거나 극도로 리얼하거나 지나치게 쿨하거나 해서

감탄의 대상이 될 지언정 열광의 대상이 되기는 좀 힘들죠

개인적으로는 오직 당시의 홍콩느와르만이 그 열광의 대상반열에 오를 수 있는 영화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점점 쿨하게 변해가지만 비루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들에겐 여전히 카니발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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