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27 07:01
영화가 왜 망했는지를 알겠군요.-_-;
강우석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았을 땐 못해도 500만은 목표로 잡았을 것 같은데, 만화 내용은 도저히 500만이 열광할 만한 소스는 아닌 듯 보이더군요. 아무리 과감하게 만화원작을 각색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만화를 보면서 뜬금없이 해리슨 포드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장담은 못하겠는데, 해리슨 포드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해리슨 포드는 작품에서 자기가 맡은 배역이 어리숙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허둥대는 상황이 있게끔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런 장면이 시나리오에 있으면 고쳐달라고 요구한다는군요. 즉 작품에서 일어난 사건을 자신이 직접 해결하고, 모든 것을 파악하는 능동적인 캐릭터를 선호한다는 거죠. 사실 이런 캐릭터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일종의 주인공 전형으로 굳혀진 타입이기도 합니다. 왜냐... 관객은 필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는데, 자신이 감정이입을 한 주체가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허둥허둥거리면 해방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는 영화 관람 아주 짜증났다, 돈값 못하더라 식의 반응으로 이어지고, 입소문으로 퍼져서 흥행을 방해합니다. 물론 이를 극복하고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도 많지요. 듀나님이 말씀하신 필름 느와르 캐릭터들은 오히려 거대한 악에 부딪쳐 절망하는 주인공들이 많습니다. 이런 주인공들은 냉소적인 대사들을 씹어대며 똥폼을 잡고, 이런 '허무한' 모습에 관객들은 호감을 느끼죠.
하지만 한국관객들은 비교적 필름느와르 풍의 허무한 내용보단 화끈하게 영웅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유의 작품을 더 선호할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고 제가 추측형으로 쓴 이유는 이를 뒷받침해줄 통계를 제가 접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만... 적어도 관객들이 '익숙한 것에 호감을 더 느낀다'라는 특징을 생각해보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열심히 방영하는 대장금, 주몽류의 작품들을 주로 접한 한국관객들이 '주인공이 사건 하나 제대로 해결 못하고 허둥거리는' 스토리의 내용에 쉽사리 호감을 가지긴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만화 이끼에서 주인공은, 박검사의 말을 빌리자면 '터널의 함정'에 눈이 가려져 사건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내내 허둥거립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역할도 박검사가 맡고, 주인공은 관객들이 만족할 만큼 끝까지 화끈한 활약을 하지 못합니다. 영화를 안 봐서 단언은 못하겠습니다만, 이런 기둥이 영화에서도 크게 변했을 것 같진 않네요. 게다가 각 조연들의 사연 또한 주인공이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만화에서 그냥 '보여집니다'. 주인공이 한 일은 마을에 뭔가 큰 비밀이 숨어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 자신에게 감정이입을 한 독자들을 만화 속 지옥으로 떨어뜨려 함께 허둥거리게 하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취향에 안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끼는 인상에 강렬히 남는 만화였네요. 말 그대로 '인상에 강렬히 남는', 화려한 비주얼의 만화. 허영만씨 말씀대로 이끼를 보고 나니 흑백만화는 생명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계속 말하는 '더러운 기분'을 아주 잘 살렸더군요. 작가의 애초 관심도 화끈하고 시원한 미스터리 해결이 아니라 '더러운 기분의 묘사'였을 겁니다. 이 '더러운 기분'을 막판 엔딩까지 철저하게 끌고간 작가의 고집이 놀라웠습니다. 주인공이 절규하듯 이장이 그렇게 간단히 죽지 않고, 만약 시원하게(?) 죽었다면 아마 판매부수가 더 올라갔을지도 모르죠.('더러운 기분'을 매우 사랑한 골수팬들이라면 막판에서 만화가 망가졌다고 흥분했겠지만...)
조만간 제 주머니에서 5만원이 날아가겠군요.(한숨)
딴 이야기지만, 전 '싸움에서 당당히 이기고 돌아온 태극전사/태극 여전사'가 정말 싫습니다. 이런 노골적인 군사문화적인 용어라니. 왜 언론에서 자제하지 않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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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7 11:27
2010.09.27 13:41
추신 - 한국인은 의외로 호전적인 민족이니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집단/혹은 사람들 모임'에 가까워 보이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