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크린의 한계, [돈 조반니]

2010.10.07 01:59

taijae 조회 수:4037


가끔 대형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보다 보면 갑갑함을 느낄 때가 있다. 웬만큼 앞자리가 아니고서는 배우들의 표정이나 입모양을 섬세하게 살피기 힘들기 때문이다. 조금 경제적인(?) 가격으로 공연을 볼라치면, 조금만 집중력을 잃어도 무대는 ‘내가 지금 TV를 보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먼 곳에 존재하게 마련이다.


영화 [돈 조반니]를 만든 스페인의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도 비슷한 갑갑함을 느꼈던 걸까? 영화는 오페라 ‘돈 조반니’ 자체보다는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쨌든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 오페라의 몇몇 장면들을 스크린으로 충실히 옮긴다.


1781년, 베니스에서 추방당한 방탕한 신부이자 천재 시인인 로렌조 다 폰테(로렌조 발두치)는 그의 친구 카사노바(토비아스 모레티)의 도움으로 음악의 도시 빈에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모차르트(리노 지안시알레)와 함께 새로운 ‘돈 조반니’를 만들기 위한 예술적 여정과 함께, 자신의 이상형 아네타(에밀리아 베르히넬리)에 대한 사랑의 여정을 동시에 시작한다.


작품은 크게 오페라와 오페라를 만드는 과정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강한 영향력이 작품을 끌고 가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오페라 속 ‘돈 조반니’처럼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로렌조 다 폰테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인 아네타를 얻기 위해 작품의 결말까지 바꾸게 된다. 궁극적으로 영화는 그와 그녀의 멜로 드라마로 귀결된다.


그 중에 눈길은 끄는 건 역시 무대 위의 오페라를 스크린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물론 영화감독이 쓸 수 있는 연장들이 모조리 동원된다. 가장 기초적으로 쓸 수 있는 연장은 역시 클로즈업이다. 우리는 ‘돈 조반니’나 ‘돈나 안나’ 같은 중심인물 뿐 아니라 ‘돈 조반니’의 시종인 ‘레포렐로’의 불안이 깃든 표정까지도 자세히 관찰 할 수 있다.


그밖에도 두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얉은 심도의 초점 조절을 통해 앞쪽 인물에 더 집중하게 하는 기법이랄지, 디졸브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간을 이동시키는 기법 등 영화적인 도구들이 제각각 존재감을 과시하며 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기기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뒤로갈 수록 이런 오페라 장면들은 점점 지루해진다. 오페라라는 형식 위에 또다시 영화라는 형식을 덧  씌운 꼴이 되어 갑갑함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갑갑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오페라와의 대결에서 스크린의 장점이 부각되는 게 아니라 한계만 보여준 꼴이 돼버렸다. 


또 영화는 인물을 제외한 배경을 유화적인 느낌으로 도배하는 등 끊임없이 미학적 시도들을 멈추지 않지만, 그런 요소들이 하나의 점으로 통일되지 못한 채 산발적으로 그치고 마는듯한 느낌을 준다.


창작자가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영향을 받아 작품을 수정해 나가는 과정 자체는 재밌는 소재가 될 수도 있지만, 다 폰테와 아네타의 멜로드라마 자체가 조금 심심하다 보니 구성의 긴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 폰테를 통해 성공하려는 속물 소프라노 가수 아드리아나(케테반 케모클리제)쪽의 이야기가 좀 더 구미를 당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아리아들은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은 오페라 ‘돈 조반니’을 감상하기 전의 기대감과 감상한 후의 이해를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점일 지도 모른다. 혹은 미국 관객을 위해 어거지로 영어를 하는 모차르트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점수를 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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