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지만, 마음보다는 머리로 좋아한 편이었어요. 늘 그의 영화가 흥미롭고 날카롭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비슷한 소재를 반복함에도 계속 보게 하는 힘이 있음을 매번 느껴왔지만, 그것이 어떠한 예술의 경지, 인간 존재의 본질에 근접한 무엇이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홍상수 영화에 관한 여러 평론가의 글을 정말 '닥치는 대로' 읽어가며 느낀 감상도 비슷했죠. '그래, 확실히 이 감독의 영화에는 그런 힘이 있어. 그리고 어쩌면 그 힘이 이러저러한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을 진정 내가 느낄 수는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옥희의 영화]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동안은 그냥 단순히 멀리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며 '저것은 재밌고, 저것은 날카롭네' 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도저히 거리를 유지할 수가 없었어요. 감독이 말 그대로 자신의 전 존재를 가져다 놓고 '나는 이렇다, 너는 도대체 어떠냐'고 끊임없이 묻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이 영화를 가리켜 '처연하다'고 했는데, 그 표현에 십분 동감이 갔습니다. '주문을 외울 날'과 '폭설 후'가 특히 그러했는데, 이선균의 연기를 보며 울컥하다가, 문성근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이 터지더군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하하하까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면 모조리 다 찾아보았는데 보면서 눈물이 나온 것은 이번 영화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오늘 유달리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있었다거나... 하는 경우의 수도 배제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보다 저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뭔가 예술 비슷한 것을 해보려고 하는 학생으로서, 욕망에 시달리는 동시에 어떠한 순수함을 생에서 배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옥희의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세상 앞에 초연할 수가 없었기에 그런 반응을 했던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홍상수 감독이 남녀의 짝짓기가 아닌 다른 것을 자신의 주요 소재로 택해서 영화를 찍어왔더라면 진작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같은 것은 우습게 받아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 허세 섞인 생각마저 들었어요. 정말 홍 감독님의 영화를 볼수록, 물론 그가 천착하고 실제로도 가장 크게 끌리는 대상은 '성'과 관련된 것 같기는 하지만, 그 노골적인 소재만으로는 도저히 그의 영화 세계를 포괄해낼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아예 제쳐 두고 살펴보아야 더 선명히 보인다는 감상이 듭니다. 


아무튼 '옥희의 영화' 아직 안 보신 분들께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이 영화는 제 인생의 영화가 될 것 같네요.



(덧)


써놓고 보니 제목이 좀 오만하게 보이네요. 그냥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감상하며 어떠한 본질에 접근하는 체험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 정도의 의미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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