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미국이 한국을 닮아간다

2010.10.12 10:18

호레이쇼 조회 수:5047

미국의 리버트 피핀이라는 교수가 미국 문화의 속물화에 대해 뉴욕 타임즈에 쓴 글 일부를 인용하며, 어느 블로거가 미국에서 사는 소감을 쓴 글입니다.

블로그 주인장이 사람 유입을 싫어하는 분인 듯 하여 링크는 생략합니다.


(이하 전체 다 퍼온 글)


(로버트 피핀: ) 문화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기실, 8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마저 없는 듯싶다.) “미국 정신의 종언”이니 “문화 文解”(Cultural Literacy)니, “교수들의 사기”니 “종신직 얻고서 과격분자가 된 사람들”이니 하는 표현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직 있을까 싶다. 그때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이따금씩 다시 나타나기는 한다. 96년에 앨런 소캘─’소셜 텍스트’ 사건도 있었고 글을 가장 엉터리로 쓰는 사람들(註 ─ 대개 글을 가장 개판으로 쓰는 사람들은 ‘탈구조주의’니 ‘해체’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는 틀로 문학, 문화 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상을 둘러싼 소동도 가끔씩 벌어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학과 대학의 사명 및 문화 전체에서 대학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 등은 완연하게 변했다.

설령 그때의 문화 전쟁이 빛을 밝히기보다는 열만 냈을지언정 적어도 그것은 가치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었다. 지성인이 알아야 할 것들, 대학의 목적에 관한 논쟁이었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남짓 세월 동안 그러한 담론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종류의 담론이 들어앉았다. 곧, 대학 학비, 대학 운영비에 관한 담론, 이른바 ‘명문’ (elite) 대학에 자식을 들여보내려 목매는 부모들에 관한 이야기, 대학 졸업장 있어봐야 졸업하고서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탄식, 학생들 사이에서 만연한 표절 문제,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 받지 못하면서 우리 학부생들의 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시간강사들, 책의 종말, 독서의 종말. 그러나 이러한 비용과 근심 밑에 깔려있는 것, 궁극적인 것에 대한 담론은 요새 들을 수 없다. […]

- (블로거 코멘트: ) 시카고 대학 로버트 피핀 교수가 넓게는 문화비평, 좁게는 예전 탈구조주의자들이 설치던 시절을 주저리주저리 그리워하는 글인데 별 재미는 없어서 더 옮길 만하지 않다. 한 이년 전쯤에 ‘앙스튀 데튀드 폴리티크 드 파리’ 교수였던 프랑스와 큐세의 “프랑스 이론” 서평을 스탠리 피시가 뉴욕타임즈에 내었을 때 그것을 전문 번역해서 포스팅한 적이 있지만, 한때 이 ‘문화전쟁’은 피만 안 튀겼지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화혁명’에 비견될 만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옛날 이야기이다. 

어제 무슨 이야기 끝에 아내에게 “미국도 참 많이 변한 것 같아”라고 했더니 으레 그렇듯이 아내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뭐가?”라고 묻는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올 적만 해도 뭐랄까, 여유라는 게 있었고 그게 참 부러웠다. 일본과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왔을 때 내가 가진 느낌은 일본과 독일의 분위기를 적절하게 버무린 곳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들도 우리와는 달리 순진했고 (물론 백인 중산층 아이들 얘기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듯했다. 난 그게 또 그렇게 부러웠다. 다 지난 얘기다. 점점 미국은 한국이 되어가는 듯싶다. 하기야 말해 뭐할까. 오바마가 매일 한국 본받자고 하는 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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