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몇해 전 이야기인데요. 그 사람은 모스크바 출신의 부자집 자제였어요. 어린나이인데도 너무 박학다식해서 모든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또 외국어는 몇개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하고 취미로 그리스 고전을 읽는 그런 애였죠. 그냥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완벽한 매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게, 아니 어떻게 해도 싫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있죠.


어느날 저는 열등감에 못이겨 그 아이에게 시를 썼어요. 다른 방도가 없었죠. 제목은 "A poor poem for 그 아이 이름". 그리고 내용은 좀 코믹하게 썼던걸로 기억해요.

처음에 그 아이가 내 시를 보곤 웃는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다음번에 또 쓸 각오를 했어요. 이번엔 좀 더 실험을 했죠. 그 아이가 왠만한 외국어를 다 구사하는 걸 아니까 한번 

놀래켜 주려고 아니 사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잘 안쓰일 것 같은 희랍어로 썼어요. 물론 저는 희랍어를 전혀 모르고 사전에서 단어만 찾아다가 대충 순서만 맞추었죠.  


아마 이건 모르겠지 하고 그냥 추상화인듯 시인듯 글자옆에 그림(낙서)도 살짝 그려넣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걸 받고는 저보고 문법이 틀렸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때부터 저를 대하는 태도도 살짝 달라졌어요. 물론 겉으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지만 아주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는 그런 감정의 변화말이에요.


몇달 후 그 아이, 그리고 항상 함께 하던 몇몇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어요. 저는 몸이 아파서 홀로 남았고요. 그리고 그때가 제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마지막 모습이에요.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유태인 학살에 관한 책들과 이야기, 비디오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어요. 전부터 알았던 것이긴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때 다시 관심이 갔었고 문득 그 아이 생각이 났어요. 그 무렵 제가 본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유태인이 그랬죠. 자기는 진짜 친구인지 아닌지 확인할 때 이 사람이 나를 숨겨줄 수 있는지 본다구요.



아무튼 제 일생에서 만난 가장 저와 레벨이 달랐던, 다른 세상에 살던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에요.

그 아이가 제게 쵸콜릿 사탕을 줄 때의 눈부신 햇살, 둘이 걸었던 공원 그리고 그 아이의 유쾌한 말투가 떠오르면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그런 말투는 그 이후로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결국 지워버려야겠죠?  제가 살려면.



1955년 1월 28일

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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