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 - 장정일

2015.03.12 10:58

DJUNA 조회 수:268615

널리 퍼트려 달라고 하셨으니 여기다 옮겨도 된다고 생각하고 올립니다. 혹시 전에 올라왔었나요.



  지난 1월 7일 파리에서 일어난『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에 대해, 나는 도합 세 번의 글을 썼다. 이 사건에 관심은 있었지만, 글은 기회가 되면 천천히 쓰리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되었다. 나로 하여금 첫 번째 글을 쓰게 만든 계기는 <한겨레> 신문 1월 31일자에  정희진씨가 쓴「관용」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나는 정희진씨의 연재를 기다리면서 읽는 애독자이지만, 쿠아시 형제의 범행을 “얼마나 분노했기에 비난받을 것이 뻔한 행동을 했을까?”라고 감싸는 것에 우선 말문이 막혔으며, 이슬람을 약자로 전제한 채 “권력을 향한 풍자는 미학이지만 약자를 조롱하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 강한 의구심을 느꼈다. <한겨레> 신문 2월 5일치에 실린 나의 글「‘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에 대해」는 쿠아시 형제의 범행을 감싸는 것은 ‘타락한 관용’에 근거한 것이며,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라는 두 가지 주장을 담았다. 전문을 소개한다. 
    
  2015년 1월 7일, 파리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논의가 끝날 줄 모른다. <한겨레> 지상에서도 여러 칼럼니스트와 독자가 의견을 밝혔다. 그 가운데는『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는 주장이 많다. 『샤를리 에브도』의 과격한 풍자를 꾸짖는 사람들은 상식처럼 보이는 ‘표현의 자유’가 알고 보면 서구 중심주의적인 폭력이며 서구 세속주의자에게만 유효한 무기라고 비난한다. 풍자를 당하는 이슬람은 서구 주류 사회 안의 절대 약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관용은 약자를 보살피고 개별성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오만한 서구 대 핍박받는 이슬람’이라는 구도로 이번 사건을 본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이슬람근본주의에 눈감는 반쪽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영미 제국주의가 중동에 심어놓은 이스라엘이 이슬람근본주의를 불러왔다거나, 쿠아시 형제가 이슬람근본주의에 심취하여 예멘 알카에다와 접속하게 된 원인 또한 프랑스 다문화주의 정책의 실패에서 찾는 분석이 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도 소설가 살만 루슈디는 1988년, 영어로 집필되고 출판된『악마의 시』라는 소설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와 코란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이듬해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로부터 사형Fatwa을 선고 받았다. 현재 루슈디는 330만 달러의 현상금을 목에 걸고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지만 이탈리아․노르웨이․터키의 번역자는 피습을 받고 중상을 당했으며, 일본인 번역자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는 자신이 근무하던 쓰쿠바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 루슈디와『악마의 시』번역자들은 하나같이 이란 사람이 아닌데,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무슨 권한으로 타국의 국민에게 사형 선고와 그것에 준하는 처벌을 선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각 나라의 주권과 국제법을 괘의치 않는 이슬람근본주의가 있는 한, 세계는 여전히 교황이 파문권을 행사하던 중세다.    

  세계화와 세속화에 직면해 앞으로 점점 증가하는 풍자와 조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의 운명이다. 이슬람권 안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 속한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이 운전을 할 수 없고, 이집트 여성은 청바지를 입을 수 없다. 이슬람 율법이 강한 국가에서 여성이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리다가 죽어가거나, 강간을 당한 누이를 남자 형제들이 ‘명예살인’하는 것도 다반사다. 그런 나라에서 이슬람을 비판하거나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예 자살 행위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근거가 된다. 이슬람은 그때마다 테러로 응수할 텐가? 설령 누가 진지하고 예의를 갖춘 비판을 하더라도 오늘 같은 상황에서는 테러를 피하기 힘들다. 

  관용은 ‘샤를르 에브도 사건’ 이후 가장 많이 들먹여진 용어다. 모두들 관용에 대해 한 마디씩 하지만, 관용의 가장 타락한 사용법은 ①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②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한다. 즉 우리는 ①,②의 태도와 발상을 간직한 채 이슬람을 ‘아이’ 취급하고, 그들에 대한 이의 제기를 ‘폭력’ 행사나 되는 양 자기 검열을 해온 것이 아닌가? 과격하게 말해, 비판이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 미소 띤 얼굴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써 온 허다한 프랑스 지식인들의 타락한 관용이 풍자만화가들을 참극으로 내몬 게 아닌가?

  결코 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 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숫자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다. 이슬람은 고령화 되어가는 다른 종교와 달리 가장 많은 20대 신도를 가졌다. 서구로 유입되는 이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다. 이슬람은 서구를 향해 자신을 아이 취급하고 예외로 다루어 달라고 더는 징징거리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들이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위의 글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가리켜 “이슬람권 안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에 속한다”고 쓴 것은 나의 실수다.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에게 많은 전사를 공급한 수니파 와하비주의자들의 본거지가 사우디아라비아며 종교경찰의 위세도 대단하다. 나는 장기간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 친미파 정권 사우디아라비아를 “자유로운 나라”로 착각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저 대목을 빼고 읽어 주시기 바란다.
  <한겨레> 에 쓴「‘이슬람근본주의’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에 대해」가 너무 짧아서 새로운 글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 이택광이 두 차례에 걸쳐 아래와 같은 트윗을 올렸다. 
    
  ①내가 보기에 “서구로 유입되는 이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다”는 근거로 “이슬람이 약자가 아니다”고 주장하는 장정일의 생각은 나이브하다. 그 이유를 박노자의 글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②“이슬람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한 숫자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라서 약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억지스럽다. 그렇다면 부자 1%에 대해 그렇지 않은 99%도 강자일 것이다.

  내가 준비 중이었던 두 번째 글은 2월 16일 발행된『시사IN』설날 특집호에「이슬람이 약자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전문을 소개한다.
    
  2015년 1월 7일, 예멘 알카에다와 연계된 쿠아시 형제가 풍자 주간지『샤를르 에브도』를 습격했다. 내가 읽은 대부분의 칼럼은『샤를리 에브도』의 풍자가 약자를 향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프랑스 안의 무슬림이 약자인 것은 맞지만, 그 사건은 한 나라에서 계획된 일국一國의 범죄가 아니었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은 강하다’고 말하는 반면, 미국의 주류 사상가들은 ‘미국은 약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슬람이 ‘약자인가, 아닌가’도 상대적이다.

  상식이 없는 사람만 모를 뿐, 하나의 문명권이나 지역의 흥망성세를 다룰 때 인구는 반드시 고려되는 상수다. 현재는 이슬람권의 인구가 그들을 강자로 환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지 않지만, 인구는 언젠가 그들을 강자로 만들어 줄 잠재력이다. 서구로 유입되는 무슬림의 증가가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이슬람공포증)를 부르고 그것이 유럽의 극우주의로 되먹임 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한 사회나 문명이 가진 힘의 총량을 하드 파워hard power로만 계산하는 습관에 익숙하지만, 어떤 사회나 문명에서는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더 위력을 발휘한다. 이슬람은 서구만 한 군사적 하드 파워는 없지만, 강력한 소프트 파워(종교)가 있다. 우리가 무신론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누구도 한 사회에서 종교가 갖는 규정력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면서 종교를 허구나 마취제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을 가리켜 슬라보예 지젝은 관념론자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의 전쟁이 비대칭 전쟁Asymmetric warfare인 것도 중요하다. 9․11 직후에 일으킨 두 개의 전쟁에서 미국은 정복과는 거리가 먼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 탈레반도 알 카에다도 뿌리 뽑지 못했다.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 직후, ‘관용’이 만병통치약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이런 시대일수록 관용을 의심하면서, 관용의 타락된 사용법을 물리쳐야 한다. 나는 2011년 10월『시사IN』216호에서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상대방을 아이로 취급하면서 상대방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 둘째, 어떤 진리든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모두 폭력이라는 발상에 근거한 조바심. 이런 태도와 발상에서 출발한 타락한 관용은 비판이 꼭 필요한 근본적 차이를 문화적 차이와 생활 방식의 차이로 변질시키고, 스스로를 자기 검열하면서 표현의 올바름에만 신경을 쓴다. 미소 띤 얼굴로 서로 듣기 좋은 덕담만 하는 게 관용이라면, 그 아무도 자신의 신념이나 현상을 바꿀 필요가 없어진다. 

  관용의 엄격한 사용이 상대를 ‘어른’ 취급하는 것이라면, 관용의 타락된 사용법은 상대를 ‘아이’ 취급하는 것이다. 상대를 아이 취급하지 않고 어른 취급하는 일이나 스스로를 아이가 아닌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찾을 수 있는 윤리적 이점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기 책임의식의 배양이다. 내가 당신을 어른 취급 할 때, 비로소 나는 당신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해야, 자신에 대한 책임의식이 생긴다. 이슬람을 아이로 취급하는 서구의 인식론적 폭력이나 이슬람 스스로가 자신을 약자로 자처하는 기만행위 속에서는 그 어떤 존중이나 책임의식도 싹트지 않는다. 이슬람을 약자로 간주하려는 사람은 이슬람에 대한 존중을 내버린 사람이며, 이슬람을 향해 자기 책임의식 따위는 내팽개치라고 선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우리 모두가 타락하는 길이다.

  세계화와 세속화에 직면해 앞으로 점점 증가하는 풍자와 조롱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슬람의 운명이다. 이슬람 율법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여성의 운전과 청바지가 금지되어있다거나, 여성이 남자 의사의 진료를 꺼리다가 죽어가는 일, 강간을 당한 누이를 남자 형제들이 ‘명예살인’하는 따위의 야만은 충분히 이슬람을 풍자하고 조롱할 근거가 된다. 이슬람은 그때마다 테러로 응수할 텐가? 이슬람이 진정 유서 깊은 역사와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면, 이제껏 길러온 문화의 힘으로 풍자와 조롱에 맞서야 한다.

  진보라 일컫는 논객들은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의 총체적 접근에 관심이 없다. 그저 한국 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에 외삽 시키고,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을 한국 상황에 필요한 교훈이나 경고로 전유할 생각뿐이다. 그런 목적에서 쿠아시 형제의 테러는 프랑스 내국인 사이에 불거진 계급문제로 축소되고, 그들의 배후인 이슬람 근본주의는 사건 관계도에서 지워졌다. 이들의 말이 맞는다면, 쿠아시 형제를 지도한 예멘 알카에다는 무려 전 세계의 계급투쟁을 위해 창설된 국제 노동자 연맹이고,『샤를리 에브도』를 급습한 것도 심지어 계급해방을 위한 거사다. 그렇다면 향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승리 속에 무슬림이 아닌 서구 백인이나 아시아계 프롤레타리아트도 기입될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은가? 그게 아니라면, 쿠아시 형제의 범죄는 인종차별에 맞선 또 다른 인종차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진보 논객들이 참극을 맞은『샤를리 에브도』를 한번도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로 옹호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외삽과 전유가 매끈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샤를리 에브도』가 절대 언론사가 되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진보 논객들에게『샤를리 에브도』는 새누리당이고 재벌이고 10%여야만 했고, 쿠아시 형제는 비정규직 노동자고 실업자며 90%를 뜻해야만 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프랑스 파리에서 생긴 사건은 이렇게 해서 ‘월드 뉴스’가 아닌 ‘대한 늬우스’가 되었다. 

  웬디 브라운의『관용』(갈무리,2010)은 관용이 더 이상 수동적인 가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이 시대의 필독서다. 서구가 주도하는 다문화시대의 관용이란,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타자를 배제’하는 수단에 이용된다. 이때 포용과 배제를 정하는 관용의 기준은 서구의 지배적인 가치와 문화다. 또한 관용은 당면한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자기 내부에서 분출하는 정치․사회적 적대를 ‘차이’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지금까지 이 주제의 막강한 고전이었던 볼테르의『관용론』(한길사,2001)이나 필리프 사시에의『왜 똘레랑스인가』(상형문자,2000)는 낡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해독害毒이 필요한 문서로 보인다. 우려되는 것은, 관용이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라는 이 책의 논지를 너무 잘 수용한 나머지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앞서 나온 이택광의 트윗글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위의 글에 나온  “상식이 없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관용』의 역자가『시사IN』에 나온 내 글이 『관용』의 요점이 아니라면서 "헛다리"'를 짚고 있다길래, 메일을 해서 오해를 풀어 주었다. 저 글은 차례대로 ①이슬람은 약자가 아니다. ②어떻게 하면 ‘관용의 타락한 사용법’을 뿌리칠 수 있을까. ③이번 사건에 대한 한국 좌파 논객들의 편향적 자세에 대한 나의 생각을 피력한 글이며, 그것들은 마지막 문단에서 가서야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연재의 알리바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언급된『관용』과 아무런 연관성 없이 씌어 졌다. 웬디 브라운의 여러 논지 가운데 이번에 내가 선택한 것은  “관용이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라는 사항이었으며, 그 주장을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그런데 메일을 통해 역자의 오해를 풀었다고는 하지만, 내가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무신경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자분은 내가 메일로 그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했던 진짜 '목적'은  헤아리지 못하나보다. 내가 모종의 부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이건 내가 그에게 '빚질' 사항이 아니라, 역자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종'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 글 끝에 나온다).     
  두 번째 글을 쓰고 나서, 나는 이슬람국가IS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쓰기 위해 이런 저런 책을 모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3월 2일(월요일) 저녁 <한겨레> 신문으로부터 슬라보예 지젝의 신간『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글항아리,2015)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아직 책이 서점에 배포되기 전이어서, 이튿날 오후 2시 30분, 출판사가 퀵서비스로 보낸 책을 받았다. 워낙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인데다가, 역자의 말을 뺀 80여 쪽의 책은 읽는 데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읽었던 데에는 지젝이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지 짐작이 되었던 데다가, 설날 이후로 이슬람에 관한 책을 꽤 읽었기 때문에 지젝이 이슬람 역사나 정치에 대해 하는 말은 오히려 이의 제기할 대목이 보일 만큼 쉬웠다. 이 글의 마감은 목요일 오후 2시까지였는데, 나는 수요일 아침 10시쯤에 원고를 보냈다(이렇게 빨리 쓰게 된 데에는 얇은 분량과 선행 학습도 큰 역할을 했지만, <한겨레>가 청탁한 원고 분량이 15매였다는 이유가 더 크다. 나는 2011년 신년호부터 지금까지 4년 넘게 격주로『시사IN』에 독후감을 연재하고 있는데, 그 분량이 15매다. 그래서 매번 아홉 문단으로 써온 그 리듬을 고치지 않고 탈 수 있었다). 전문을 소개한다. 
    
  『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을 일으킨 쿠아시 형제와 그들의 순교를 지지하는 무슬림은 풍자 화가들의 예의 없고 저속하며 지나친 조롱이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저런 주장은 이슬람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기각해야만 옳다. 이를 테면 우리는 누군가와 논전을 벌일 때 ‘인신공격은 삼가 해 줘, 대신 진정한 비판이라면 받아들이겠어’라고 당부하고는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다. 인신공격이나 퍼부어 대는 작자는 마음속으로 경멸할 수 있으나 정곡을 찌르는 비판은 견디기 힘들다.

  무슬림은 이슬람에 대한 조롱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조롱이 아니라 예의와 진지함을 갖춘 학구적인 비판이었다고 해보자. 그런 글이 이슬람에게 수용될 수 있었겠으며, 그 글을 쓴 학자는 과연 테러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학자의 명망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는 더더욱 테러를 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진지한 비판은 오히려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조롱과 달리 이슬람에게 그를 벌하지 않으면 안 될 정당성과 필연성마저 부여해 준다. 쿠아시 형제에게 살해당한『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향해 ‘인과응보’라는 막말을 쏟아내는 좌파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마도 그 학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슬람과 같은 입장이거나 더 가혹하게 학자를 비난하고 나설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글항아리,2015)은『샤를리 에브도』테러 사건에 대한 지젝의 긴급 발언이다. 이 책에서 지젝은 “샤를리 에브도에서 벌어진 살인을 분명하게 정죄해야 한다. 은밀하게 경고하듯이 정죄해서도 안 된다”라며, 이번 사건에 대해 도착적인 논변을 편 좌파 지식인들과 본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좌파 지식인들의 ‘판에 박은 레퍼토리’를 하나씩 공박한다.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은 말한다. 샤를리 에브도를 공격한 형제들은 미국이 이라크에 주둔한 것이 너무 끔찍해서 놀랐다고 한다.(맞다. 하지만 그 형제들은 프랑스 풍자 잡지 대신 미군의 군사시설을 공격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나?) 이슬람인은 사실상 서구에서 가장 착취당하고 대접받지 못한 소수라고 한다.(맞다. 그러나 아프리카계 흑인은 훨씬 더 심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을 하거나 폭탄을 던지지 않는다.)”

  방금 본 것처럼 지젝은 맥락을 고려하자는 사람들, 곧 쿠아시 형제에게 온정적인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공박을 모두 괄호 처리 했다. 괄호는 종종 ‘이런 것까지 가르쳐 줘야해?’라는 가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형식이기도 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가운데 맥락 좋아하시는 독자가 계시다면, 괄호를 하나 더 보내 드린다. “(주문을 외우듯이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 서구인은 제3세계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살인자인데, 어떻게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정죄할 수 있는가?)”

  지젝은 긴급 발언을 통해 자유주의 좌파는 이번 테러 사건을 바로 해석하지도, 이슬람근본주의를 해결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못박는다. 좌파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중동에서 저지른 모든 잘못을 나의 십자가로 짊어지기로 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죄책감은 이슬람에 대한 밑 모를 관용으로 표출된다. 죄책감에 기초하고 있는 관용은 마치 초자아 앞에 우리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듯이 이슬람 앞에 항상 수세적인 양보를 거듭하게 된다. 결국 “네가 이슬람교도에 대해 관용할수록 이슬람교도는 너를 더 강하게 압박할 것이다.”

  죄책감에서 생겨난 관용은 현실도 정의도 왜곡시킨다. 가해자였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절멸수용소에 보내는 것을 막지 못하고 방관했다는 죄책감으로 지금껏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에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죄책감이 잘못된 속죄의식이라면,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 대한 좌파의 어물쩍한 태도 역시 잘못된 속죄의식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전반부는 이슬람근본주의 테러집단은 ‘악마’가 아니라 서구 근대화가 부러운 ‘열등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칼리프 시대를 회복해야 한다면서 실제로는 근대화를 추종한다는 점에서 나치가 등극하기 직전에 창궐한 ‘보수 혁명 운동’과 닮았다. 후반부는 이슬람근본주의의 발생 원인을 서구 제국주의나 세계화 또는 서구의 반이슬람주의 같은 외부 요인에서 찾는 이들과 달리, 이슬람의 기원에서 찾고자 한다. 스탈린주의를 공산주의의 오점으로 보지 않고 스탈린주의로부터 평등을 급진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지젝은 여기서도 똑같은 마술을 반복한다. 즉 이슬람 최대의 약점이자 이슬람근본주의자들 손에 더욱 악화된 여성 학대가 실은 이슬람의 부정성을 덮으려는 안쓰러운 증상이며, 이슬람 현대화는 애초에 무함마드를 계도하기도 했던 이슬람 여성의 주체화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약간 김빠진 암시가 그렇다. 지젝의 말버릇을 흉내 내자면, ‘이것만으로는 테러를 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관용은 서로를 자기 책임의식을 지닌 어른으로 대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9․11은 이슬람이 서구를 향해 ‘우리를 성인 취급 해달라!’는 통첩이었으나 서구는 그것을 묵살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어떤 일화는 서구 제국주의 탓이 아니라, 이슬람 내부에 어른이 되기 어려운 장애가 있다는 의심을 품게 한다. “강간 같은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여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확정”하고 있는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강간을 당한 소녀는 체형에 처하고 기혼녀는 간음죄로 사형된다. 까닭은 “남자가 여자를 강간할 때, 그는 이미 그렇게 행동하도록 유혹받았거나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자극을 주면 본능이 반응한다는 이 구조와 풍자에 자극 받아 총질을 해대는 무슬림 청년의 테러 행위는 얼마나 흡사한가! 강간은 남자의 죄가 아니라 자극받은 본능의 어쩔 수 없는 자동 반응이라고 배우며 자라난 무슬림 남성의 자기 합리화 속에 자기 책임의식이 배양될 리 만무하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라는 예수의 말에 따르면, 본능 이전에 자기 점검이 가능한 만큼 책임의 주체도 그만큼 뚜렷한데 말이다.
    
 
  잠시 나왔지만『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전반부는 이 책의 원제인 ‘이슬람과 모더니티’에 대한 지젝의 해석이고, 후반부는 이슬람에 대한 지젝의 내재적인 비판이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이번 서평에서는 지젝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자유주의 좌파들의 이슬람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관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책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맥락과 비판은 애초에 내가 준비하고 있던 이슬람국가에 대한 원고에 들어갈 것이다.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서평을 보고, 대한민국에서 지젝에 대한 유권해석을 위임받은 듯 자임하는 이택광이 아무 말이 없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언급은 100% 내가 예상한 대로 나왔다. 
    
  장정일 선생이 지젝 신간에 대해 한겨레에 서평을 쓴 것 같은데, 책 내용을 반대로 소개하고 있어서 좀 재미있다. 지젝이 본문에서 비판하는 '자유주의 좌파'가 바로 장정일 선생 같은 관점을 취하는 이들이다.
    
  이택광은 내가 “자유주의 좌파”의 관점을 가졌으며 “지젝이 본문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택광은 아직 내가 무슨 관점에 서 있는지 모르나보다(세 편의 글을 보면, 너무나 명확한데!).  이택광의 트윗을 보면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읽긴 한 모양인데,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 이택광은 지젝이 무슨 이유로 “자유주의 좌파”를 비난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나보다.
  트윗을 하는 사람들은 ‘트윗은 단지 사신私信’일 뿐이라고도 하고, ‘트윗은 소통’이라고도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작자들은 반드시 ‘오함마로 아가리를 깨부수어야 한다.’ 먼저 트윗은 그 기술 속에 리트윗 기능이 탑재 되어 있는 만큼, 절대 사신일 수 없다. 트윗을 하는 사람이 은연중에 ‘무한 트윗’을 의식하고 있는 바에야 그것이 사신일 리 있는가.
  또 트윗은 일방적인데다가 타인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데나 주로 사용되지, 결코 소통이 아니다. 비방과 조롱도 소통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이 잘못했거나 실수했을 때 트윗을 통해 정정을 해야하는데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가 밝혀지면 그저 ‘잠수’를 할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장정일 선생이 지젝 신간에 대해 한겨레에 서평을 쓴 것 같은데, 책 내용을 반대로 소개하고 있어서 좀 재미있다.”(←이게 내가 예상한 것)는 원래의 비방과 조롱은 계속 인터넷에 나돌아 다닌다.
  이택광은 내가 어떤 대목에서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반대로 소개”하고 있는지, 트윗처럼 일방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제대로  지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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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가 쓸 수 있는 SNS 수단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수단을 거부하는지라 고클을 이용합니다. 아무쪼록 널리 퍼뜨려 주십시오.

  *이택광씨가 지면을 얻어 반론을 한다는 소식이 있어, 제목과 본문 일부를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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