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5 15:23
날씨도 한없이 가라앉고, 해외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어처구니없이 죽고 다친 사람들 소식을 듣다 보니
그냥 좀 격렬한 영화를 보고 싶더군요. 예전부터 봐야지 했던 영화들 세 편을 몰아서 봤어요.
Julia(1977), Maurice(1987), Isadora(1968) 순으로 봤는데 전부 등장인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영화들이군요.
역시 저는 생생하고 강렬한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에 끌리는 것 같아요.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라는 배우, 참 매력적이네요. 이렇게 눈에서 광채가 나는 듯한 배우는 처음 봤어요.
<이사도라>를 보고 나서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못 받다니 도대체 누가 받았나 하고 찾아봤는데
받을 만한 배우가 받긴 했더군요. 그래도 이 영화로 레드그레이브가 칸 여우주연상을 받아서 좀 덜 섭섭해요.
<줄리아>에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나와요. 줄리아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고요.
제인 폰다가 사실상 주인공이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지만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연기한 줄리아의 모습은 참 생생해서
정말 나치 하의 독일에서 지하 운동을 하는 정의롭고 굳센 여성운동가 같았어요.
줄리아를 위해 마음 약한 릴리언(제인 폰다)이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떠맡은 것도 이해가 되고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은 뭔가 제 마음을 울리는 게 있는 영화를 만드네요. 전에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파계>를
봤을 때도 그랬고 <줄리아>도 그렇고... 이 감독 작품을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줄리아>를 먼저 봤기 때문에 이런 강한 역할을 한 배우가 이사도라 던컨 같은 무용수를 도대체 어떻게 연기했을까
궁금했는데 와, 멋지더군요. 영화 시작하고 조금씩 보여주는 춤을 통해 이사도라 던컨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것 같았어요.
온몸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거침없이 자유로운 사람, 온몸에서 생명력이 솟아나는 듯한 사람의 격렬한 사랑 얘기였어요.
저는 이런 강렬한 캐릭터를 좋아해서 앞으로도 레드그레이브의 영화들을 종종 찾아볼 것 같아요.
<모리스>는 동성애가 금지되었던 시절의 동성애를 그리고 있는데 휴 그랜트가 이런 영화에도 나왔었군요.
모리스 역을 맡은 제임스 윌비라는 배우는 처음 보는데 영화 초반에는 어리벙벙하고 별로 매력이 없더니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멋있어지고 슬픈 분위기에 연기도 잘하는 느낌이어서 신기했어요.
찾아보니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네요.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 사회적인 파멸을 의미하는 시대에 그런 자신을 뜯어고치는 사람과
그런 자신을 어쩔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다 가슴 아픈, 아름답고 슬픈 영화였어요.
줄리아, 모리스, 이사도라, 이 세 영화 모두 사랑에 헌신하는 사람을 그린 영화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걸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거든요.
마음을 흔드는 영화를 연속해서 세 편이나 보니 머리가 얼얼하네요.
2015.11.15 15:41
2015.11.15 17:24
돌무를 서로 보내면서 얼른 만나기나 하지.
2015.11.15 19:38
예전에 어디 여행 가면 예쁜 돌들 주워오고 사오고 했는데
그 돌들 다 어디 갔나 모르겠네요.
이런 시가 있는 줄 알았으면 잘 보관해 두는 건데...
(하늘에 달이 없어서 시 한 편~)
초승달
김경미
얇고 긴 입술 하나로
온 밤하늘 다 물고 가는
검은 물고기 한 마리
외뿔 하나에
온 몸 다 끌려가는 검은 코뿔소 한 마리
가다가 잠시 멈춰선 검정고양이
입에 물린
생선처럼 파닥이는
은색 나뭇잎 한 장
검정 그물코마다 귀 잡힌 별빛들
나도 당신이라는 깜깜한 세계를
그렇게 다 물어 가고 싶다
2015.11.15 18:08
2015.11.15 19:50
이 분은 뿜어내는 에너지가 강력해서 셰익스피어 연극이나 시대극에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멋진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싶을 때 찾아보려고요.
(이제 차가운 비는 그만 오고 따뜻한 눈이 오길 바라며 시 한 편~)
눈 내리는 밤
박정대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눈은 처음엔 하염없는 영혼이었네, 저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지금 내리는 눈은 제 몸을 숨기며 내리고 있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그렇게, 내리는 눈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네
고요히 음악만이 살아 있는 이 시간을 나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가끔씩 내가 이토록 고요히 살아 있는 시간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시간을 <눈 내리는 밤>이라고 부르면 안 되나, 차가운 시간 위로 내려와 대지의 시린 살결을 덮어주는 그대 따스한 숨결을 나는 지금 음악처럼 듣고 있네
세상의 후미진 곳에 서 있는 겨울 나무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손바닥을 내밀어 눈물로 젖어드는 하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네, 이런 걸 참 무모한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눈 내리는 밤마다 나는 참으로 무모해지고만 싶은데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무모한 사랑을 확인이라도 하듯 우리는 지금 소리 없는 음악 소리를 듣고 있네, 서로를 연주하는 마음이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더 깊은 이 시간, 눈에 젖은 나무들이 비로소 차분히 저희들의 기타 줄을 고르고 있는 이 눈 내리는 밤에
2015.11.15 23:28
2015.11.16 00:03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E.M. Forster를 참 좋아하는지 <전망 좋은 방>, <하워즈 엔드>, <모리스>
이렇게 세 편이나 영화로 만들었더군요. <하워즈 엔드>는 예전에 자막 없이 보다가 못 알아들어서
중간에 포기했는데 지금 찾아보니 이 영화에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배우께서 나오시네요.
당장 찾아보고 싶은데 잠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그대 집
박정대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는 물을 긷고 나는 듣고 있었네
그대 발길에 스치는 조약돌의 음악 소리
아득한 산맥을 넘어온 시간의 풍경 소리
내 마음이 가고 싶어하던 곳에서
오롯이 돋아나던 낮은 숨결의 불빛들
그 희미한 불빛의 계단을 살풋이 밟으며 내려오던
싸락눈, 싸락눈, 싸락눈의 화음
창포 강에 싸락눈이 내리는 오후
그대 물동이에 담겨
나 여기 그대 집까지 왔네
그대는 검은 천막에 사는 여인
오늘 저녁 그대는
또 한 줌의 쌀을 끓이네
저물어가는 창포 강가엔 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눈밭 속으로도 또 다른 눈이 내리는데
천막 속의 고요, 고요 속의 음악
나는 끓고 그대는 웃네
그대 집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이제사 그대의 입술 끝에 닿은
나, 고요한 한 잔의 창포 강
2015.11.16 00:28
나뭇잎도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쓸쓸하니 시 한 편~
(요즘 박정대 낭만시인의 시에 심취해 있어요.)
늑대 사냥꾼
박정대
옛날, 글자가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돌멩이 편지를 보냈다고 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돌멩이 하나를 골라 상대편에게 주면 그걸 받은 사람은 돌멩이의 생김새, 색깔, 만질 때의 느낌에 따라 보내온 사람의 마음을 짐작했겠지
그리고 다른 돌멩이를 주워 답신을 보냈지
몇날 며칠 그 돌멩이 편지를 어루만졌을 마음이 손바닥의 체온보다 더 따스하고 눈물겹지
애틋하다는 것은 갸륵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것
몽골에 가면 그대는 암사슴 같고 나는 늑대 같겠지, 후후
내가 그대에게 돌멩이 편지를 보내자 그대는 나에게 무를 보내왔지
그대에게 돌멩이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간절히 바라던 답신은 무엇이었을까
간절한 것은 외려 말할 수가 없지
어쩌면 그냥 그대 손을 잡고 살아 있는 동안 몽골 홉스골 호수에 가고 싶었는지도 몰라
홉스골 호숫가에 작은 천막을 쳐놓고 낮에는 나무 그늘 아래서 바람의 노래를 듣고 밤에는
등불 아래서 별빛의 문장을 읽으며 삶이라는 한 계절을 그대와 함께 보내고 싶었는지도 몰라
나는 지금 그대가 보내온 무 한 조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
무가 물이 되어 내 안에 갸륵한 홉스골 하나 이루려면 또 오랜 시간이 흘러가야겠지
아무것도 없는 무 아래 호수 하나 생기려면 또다시 오랜 세월이 ㄹ로 흘러와 고여야겠지
그러니 그대여, 돌멩이를 읽어줘
그것이 지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야
그리고 그대여, 읽은 돌멩이를 다시 나에게 보내줘
그게 아마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답신이었을 게야
後後, 몽골에 가면 아마 그곳 사람들은 그대는 암사슴 같고 나는 늑대 같다고 말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