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전 쯤에 해당 주제가 어떤 이유에서인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래서 한번 정리하는 글을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일단 이번에 통과된 연명치료 중단법, 또는 '웰다잉'법과 안락사의 차이에 대해서 간략하게 구분해 볼게요.


안락사 安樂死 는:

[명사] <법률>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환자에 대하여,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 위법성에 관한 법적 문제가 야기되는 경우가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아마 국내에서 자연 발생한 단어는 아닐 것이고, 일본 쪽에서 들어온 역어일 것 같습니다.

원래 단어는 euthanasia로, '좋은'을 뜻하는 접두사 eu-에 죽음을 의미하는 thanas- (thanatos에서 온 단어겠죠)

, ~한 상태를 가리키는 -ia가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안락 + 사 로 번역을 한 듯 하고요.

원래는 "an easy death", 쉬운 죽음이라고 해석하면 될까요? 를 의미하던 단어입니다.


이전에는 suicide가 좀 부정적인 의미로, euthanasia가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되고 크게 구분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죽음의 병원화(필립 아리에스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저작이 잘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병원에서 죽음을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법적 문제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euthanasia에 대한 의미의 구분이 생기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심증이.. (제 추측이니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주셔요.)


암튼 사설은 이만하고,


euthanasia는 환자의 의지에 따라,

voluntary euthanasia: 환자 자신의 의지로 요청한 경우

non-voluntary euthanasia: 환자가 요청할 수 없어(예, 코마 상태) 대리인(예, 가족 등)이 결정한 경우

involuntary euthanaisa: 환자의 의지에 반하여 진행하는 경우

로 구분합니다.

또, 의사의 행위 여부에 따라,

active euthanasia: 의사가 죽음을 유도하는 행위를 행하는 것(예, 과량의 마약성 진통제 투약)

passive euthanasia: 의사가 죽음을 연기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예, 생명유지장치 중단).

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physician-assisted suicide를 따로 구분하는데,

이 경우는 의사가 치사량의 약물을 처방하고, 실행은 본인이 직접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가 생명 윤리 공부할 때에는

voluntary active euthanasia를 허용하는 국가가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였고,

physician-assisted suicide를 허용하는 국가가 미국 오레건주, 워싱턴주, 몬타나주, 버몬트주, 뉴 멕시코주 였는데 지금은 더 늘었겠죠.

의사가 동의 하에 약물을 처방해도 실제로 투약하는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낮다는 것 때문에(추적 연구 결과가 발표된지도 좀 되었습니다),

현재 physician-assisted suicide는 허용 국가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웰다잉법의 경우, 환자 자신의 의지 또는 가족 두 명의 동의 하, 의사 두 명의 확인을 거쳐 연명치료를 중단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분류를 따지면 voluntary/non-voluntary passive euthanasia가 되겠지요.


이어서 '존엄'에 대해서..


먼저 voluntary euthanasia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보면요.

사실 사회계약설에 기반을 두고 출발한 자유주의 윤리학은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우선시한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위의 이론들은,

따라서 각 개인의 결정은 스스로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결론을 낳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자의로 결정한다면 그 결정은 무조건 타당하다는 논거가 수립되는데, 그렇다면 자살 또한 무조건 긍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유주의 생명윤리 - 소위 원칙주의로 대표되는 미국 생명윤리의 지배적인 입장 - 에서도

자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다는 식으로 발을 빼게 되었지만,

그 결과로 자신의 지반 또한 흔들리고 있지요.

(양차 세계대전이 인간의 비합리성 또는 무의식의 무서운 힘을 보여주었다고 아직도 생각되고 있고

- 이를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20세기 후반의 철학, 윤리학은 상당히 주지주의적 성향을 띕니다.)


저는 최근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좀 더 확장하여 지젝이 말하고 있는

'mere life' vs 'real life'의 구도가 소위 21세기의 '존엄'을 이해하는 데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mere life가 단지 삶 뿐인 삶, 동물적인 삶을 의미한다면,

real life는 그 이상의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에게 다르겠지요.

라캉-지젝의 입장에서 'real life'란 환상을 가로지르는 삶을 의미할 겁니다. 그들은

문화는 환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더불어

그 환상에만 사로잡혀 산다면 또한 인간답지 못하다고 - 기계일까요? -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로지른다는 것은 그것에 순종하지도, 그것을 소멸시키지도 않은 채,

문화, 사회가 환상임을 알고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가는 삶을 말할 겁니다(물론 이에 대해서는

철학적 비판이 만만찮고, 사실 라캉의 경우 이 지점에서 끈을 놓습니다. 사사키 아타루의 책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여하튼, 저는 '존엄'이라는 것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도,

'사회의 가치에 충실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잘 따지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마지막까지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저에게는 존엄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게 삶을 마치신 분이라 해도,

마지막에 평온하게 돌아가신 분이라 해도 모두 존엄한 죽음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런지요.


결말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죄송합니다.

아직은 죽음에 대한 숙고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앞 반절은 개략적인 정리라서 혹시 궁금하셨던 분들에게는 도움이 되셨으리라 생각하고,

후반절의 여담은 철학도의 넋두리려니, 생각하셨으면 마음이 좀 편해지시려나요.


간략하게 적어 퇴고를 못했네요.

다음에 좀 더 정서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으며,

모두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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