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세상에 살지 않습니다

2016.05.20 13:19

R2 조회 수:2064


어릴 때는 여행에 대한 꿈을 많이 꿨어요.

특히 혼자 오지로 가고, 노숙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요. 

이런 꿈에 대해 이야기하면 두 번 중 한 번은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야 여자앤데..." 

그때부터 억울하고 답답했어요. 내가 여자라서 뭐? 여자면 왜 기차역에서 자면 안돼? 여자면 왜 낯선 집에서 자면 안돼? 

그게 왜 멍청한 거야? 남자는 왜 되는데? 

"위험하니까..." 라는 대답이 답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악의가 돌아다닌다고, 왜 내가 내 자유를 쫒지 못하는지.

왜 그게 '현명한' 행동이 아닌지. 


실제로 여행해 보니까, 사실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습니다. 

여행지로 알려지지 않은 동유럽 시골에서 실제로 낯선 남자의 집에서 자야하는 일이 생겼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가슴이 쿵쾅거려서 잠이 안왔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말로 한밤중에 제 방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눈을 질끈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어요. 숨이 막혔죠. 

목울대를 쳐야 하나, 눈을 찌를까. 낭심을 잡을 수 있을까. 일단 나부터 때릴지도 모르니까 이를 악물자.

그리고 그 남자는 저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다시 나갔습니다. 

빛이 들자마자 집밖으로 뛰쳐나갔어요.

이제 숙소를 예약할 수 없는 지역에는 절대 여행가지 않아요.

세계지도가 좁아진 셈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전 찜질방에 가는 것도 싫어합니다. 성추행 당한 이후로 아무리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도 그 공간에서 휴식할 수 없어요. 

집을 구할 때 반지하, 1층, 유흥가, 골목은 모두 제외되죠. 당연히 비용은 올라갑니다.

야근을 해도 대중교통 끊길 시간은 피합니다. 택시 타기 싫으니까요. 집에 가서 합니다.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지면 인적이 드문데 양 옆으로 작은 골목이 많아요. 그래서 그 부분부터는 뛰어갑니다.

몰카가 화제 되면서부터는 공중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촉이 곤두섭니다.

특히 젊은 여성이 많이 다닐 만한 지역에서라면 그래요. 

쓰레기통에 많이 숨긴다고 해서 그 위로 휴지를 한 겹 덮고, 변기 위를 확인하고, 변좌를 들어보고, 타일 틈새를 휴지를 말아 막습니다.

그런데 카메라를 두려워할 일이 아니게 됐어요.

대안이 뭘까요? 남자들이 화장실에 갈때마다 데려다주는 것? 집에 갈때마다 가족이 데리러 나오는 것?

그걸 '배려'라고 느낄 지 모르겠지만 '제한'입니다. 

내 영역과 반경의 제한이고 축소입니다.


생존을 불안해 하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그냥 약자의 현실이다, 라고 수긍하고 싶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이 인간의 본능이고 본능에 따라 살아야 하는 거라면 

법은 왜 있고 제도는 왜 있나요?

폭력이 왜 불법인가요?

본능이 있는 그대로 활개치는 세상이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좋은 세상일까요?


이런 두려움은 내 물리적인 영역 뿐 아니라 사고와 행동을 잠식합니다.

낯선 남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휴대폰을 빌려주는 것처럼 간단한 일도 응하기 전에 고민합니다. 

가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최대한 차갑고 냉정한 표정을 합니다. 

웃기지만 경험상 시선을 받거나 시비가 걸리는 확률이 줄어들어요.


나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옹졸하고 불쾌하게 굽니다. 그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니까요.


스스로 생각합니다. 마치 최대한 시끄럽게 짖는 치와와같다고. 

'조심하고' 산다는 게, 세상을 얼마나 좁히는지, 얼마나 나를 제한하고 작은 인간으로 만드는지,

술먹고 길거리에서 쓰러져 자도 제일 걱정되는 게 지갑 털리고 입돌아가는 일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요. 



전 의식이 세상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첫걸음은 현실인식이고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세상은 달라요. 

이 말이 남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고 왜 설명하고 또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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