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4 12:11
숭고함은 아름다움과는 다르다고 온라인 미학 강좌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것 같아요. ^^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사나운 바다와 같은 거대한 자연에 맞닥뜨렸을 때 느끼는 놀라움과 두려움 같은 것이
숭고함이라는 감정을 일으킨다고 들었던 게 기억나요.
운명이 주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견디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두려움과 슬픔도 숭고함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 같고요.
얼마 전에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세이사쿠의 아내>를 봤어요. 이 영화를 보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주인공은 남자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짓을 그 남자에게 저질러요. 괜찮은 사회적 지위에서 멀쩡하게 잘 살던 남자를
자기 앞가림도 못하게 망쳐놓죠. 여자는 그런 짓에 대한 법적인 처벌을 달게 받을 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학대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남자를 얻는 대신 평생 그 남자를 돌보고 먹여살려야 하는 의무도 기꺼이 지려고 해요.
화목하게 살던 부부도 병이나 장애가 생기면 갈라서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요즘 세상인데 한 사람을 갖기 위해 이 정도까지
각오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런 이기적인 사랑의 방식에도 불구하고 그 강도와 희생의 대단함이 저를 압도해 버리더군요.
지난 주말에는 <베르나데트의 노래>라는 영화를 봤어요. (https://youtu.be/4qyOR7FPLx8 )
가끔 종교를 갖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종교를 갖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연약한 몸을 가지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세상을 수십 년 동안 멀쩡하게
살아낼 수 있을 만큼 인간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닌 것 같거든요. 가끔은 자신의 의지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그냥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거대한 존재가 인간에게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영화는 성모 마리아를 만나는 신비 체험을 하고 기적을 일으킨 소녀, 그리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혼란스런 반응을 보여주는 영화예요.
이 영화는 그 소녀의 체험이 진짜인가를 검증하려는 사람들의 시도를 중심으로 흥미롭게 진행되는데 마지막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숭고함을 느끼게 하죠.
어찌보면 이 소녀는 그냥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럴 운명이어서 그 길을 갔어요. 이 소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뭐 대단한 사명감이나
자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다만 그 종교적 체험이 너무 황홀한 것이어서 기쁘게 선선히 그 길을 갔죠.
숭고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거대한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말없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을 볼 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자신이 겪는 시련과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 받으려는 생각도 없고 그런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그저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볼 때 느껴지는 숭고함이 있어요.
사랑의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어도 그 사랑에 자신을 송두리째 헌신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숭고함,
믿음의 내용이 진실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어도 그 믿음에 자신을 송두리째 헌신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숭고함,
가끔 옳음과 그름, 진실과 거짓에 대한 제 자신의 판단을 유보하고 그 대상을 묵묵히 지켜보게 만드는, 그냥 그 사람의 선택과 행동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그런 압도적인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듀게분들께 숭고함을 느끼게 했던 영화나 소설이 있나요? 현실에서 일어난 일도 괜찮고요.
장대비가 퍼붓고 천둥벼락이 치고 하면 숭고함이 좀 느껴질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비가 그칠 것 같네요. ^^
뭔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맞닥뜨릴 때의 숭고함을 느끼고 싶은데 말이죠...
2016.05.24 12:25
2016.05.24 13:02
저에게 숭고함은 거대한 존재 앞에서의 공포감 및 보는 존재의 무력감과 관련되어 있어서
영화 <룸>에서 납치범의 존재가 좀 더 강력하게 드러나고 갇혀있는 상황 속에서 여주인공의
공포감과 고통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면 제 관점에서의 숭고함은 좀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감독이 여주인공과 아이의 고통에 대해 굉장히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마 그래서 그 시선에서 숭고함을 느끼신 게 아닌가 싶네요.
갑자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하비에르 바르뎀을 보면서 그 거대한 악한 존재에서
숭고함(?)을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숭고함이라는 게 꼭 훌륭한 존재에게서만 느끼는 게 아니고
추하고 악하더라도 뭔가 압도적인 존재를 대면하면서 느끼는 숙연함이랄까 판단정지의 상태랄까
보는 사람의 어쩔 수 없음이랄까, 뭐 그런 거라고 한다면요. ^^)
무플의 공포와 고통을 감내하는 각오로 숭고하게 본문글을 썼는데 댓글이 달리니까 얼씨구나 좋아서
너무 길게 대댓글을 썼네요. ^^
2016.05.26 08:01
2016.05.26 18:00
이 영화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은 관객의 이해나 판단을 뛰어넘는 불가해한 존재였죠.
미워하거나 비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게 만드는...
악당이 나오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운 나쁘게 그 자리에 있다가 갑자기
벼락 맞아 죽는 무슨 재난 영화 같은 느낌이었어요. ^^
이쯤에서 다시 보는 멋진 포스터 ^^
2016.05.24 20:56
underground님의 글을 제가 항상 좋아라 합니다.
오백 년만에 로그인 해서, 꼭 인사드리고 싶은 분이고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2016.05.24 23:05
앗, Koudelka 님 반가워요. Koudelka 님이 제 글을 좋아해 주신다니 갑자기 힘이 펄펄 나는데요. ^^
멋진 대댓글을 달고 싶은데... 별로 멋진 생각이 안 나서 오늘 어쩌다 봤던 미술품 사진 하나 붙여봐요.
기다림을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저렇게 칼로 쩌~억 그은 모양이 되는 건가 하고 왠지 가슴이 아팠어요.
Lucio Fontana - Spatial Concept 'Waiting' 1960
2016.05.24 21:27
2016.05.24 23:22
해질녘의 노을은 하루가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깨닫게 하죠.
뭔가 저항할 수 없이 슬픈 순간이에요. ㅠㅠ
Vincent van Gogh - The Old Tower in the Fields (1884)
2016.05.24 22:28
전에 영화 추천드리면서 구로사와 아키라의 [백치] 이야기를 했는데, 그 주인공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손을 가볍게 가슴 위쪽으로 쥐고, 무언가에 슬픈듯한 눈을 하고. 왠지 그 연기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더군요. 이창동의 [시]에서 나오는 할머님도 비슷한 느낌으로 그래요. 도무지 그런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현실감에 압도 당하죠. 저는 이상적인 사람들을 현실에서 보질 못했기 때문에, 그럴싸해 보일수록 놀라워요. [모모]에 나오는 카시오페아란 거북이에게서도 어떠한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하구요. (주인공에게서도 느껴지긴 하지만 궤가 다른 것 같고.) [카페 알파]란 만화의 풍경들과 어떤 순간들, 이 떠오르는군요. 등장인물들은 매우 인간적이라 숭고하거나 하지 않지만, 특정한 광경을 잡아내는 그런게 있어요. 숭고함이란 가상이건 현실이건 잡아내기 힘들군요, 거 참. 아아, [둠스데이 북]에서 키브린이 겪었던 그런 상황들도 떠오르는군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너무 진부할까요.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의 그녀, 도 기억이 나는군요. 참.
숭고함이 사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그 순간이 독서나 시청을 체험-경험으로 변화시켜요. 여러 개를 떠올리긴 했는데 뭔가, 정말로 강한 어떤걸 잊어버린 기분이에요. 그걸 떠오리려고 이것저것 생각나긴 했는데 그렇게 썩 적절한게 없군요. 현실에서 숭고함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행운이겠어요. 상상도 하기 어렵네요.
2016.05.25 00:30
낮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 Breaking the Waves(1996)가 갑자기 생각났었어요.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이 고통을 겪어야 사고를 당한 남편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남편이 사경을 해맬 때마다 점점 더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죠. 관객이 보기에는 정말 바보 같은
믿음이고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여자의 믿음과 행동을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는 게 별로 의미가 없어져요. 여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런 방식의 헌신으로밖에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는 것 같았어요.
숭고함은 저의 상식이나 계산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온몸을 바쳐 해내는 사람을 볼 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일상에서 쉽게 대면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강력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둠스데이북]은 아무리 찾아도 책도 없고 영화도 없어서 기진맥진했는데 알고 보니 [둠즈데이북]이었어요. orz
(점 하나의 숭고함이라고 할까... ^^)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은 제목만으로도 마음이 동하는 책인데 둘 다 기억해 놓을게요.
2016.05.25 00:15
'세이사쿠 아내'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를 연상하게 하네요. 저는 폭력이 가미된 그런 이야기들을 다른 무엇보다도 끔찍하게 느끼는 편이라서ㅠㅠ 개별적인 존재를 훼손하는 건 언제나 끔찍하고 늘 극복이 안되더군요. 숭고함이라.. 비참한 현실에서도 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에게 종종 그런 감정을 느껴요. 지극히 인간적인 가운데에서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에서. 자주 허무함에 시달리는 저로서는 가닿지 못할 경지쯤으로 느껴진달까요. 그게 보통사람과 에술가와의 차이겠지만...예술가라고 다 자기 영혼을 잘 지켜내는 건 아니니까요.
2016.05.25 01:12
세이사쿠의 아내가 나쁜 여자이긴 해요. ^^ 저도 어떤 형태의 물리적인 폭력도 허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당위성과는 별개로 어떤 사람에게는 제가 이해할 수도 없고 뜯어고칠 수도 없는,
그냥 저 사람은 저럴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 하고 가슴 아파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잘못은 하기 전에 막아야 하고, 저지른 후에는 당연히 벌을 줘야 하고,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서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어 가야겠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가 훌륭한 예술가라면, 훌륭한 예술가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아요.
시대를 앞서간다는 건 동시대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니까요.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있는 내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고통 받아야 하는
운명인 거죠. ^^ 그 속에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으로 내내 괴로워할 테고요. 그런 고통을 견디며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걸 끝까지 지켜내는 건 숭고한 것 같아요.
(시대를 앞서가는 게 아니라 시대에 뒤처져서 내내 인정 받지 못하는 예술가라고 해도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에 끝까지 헌신하는 모습은 숭고해요. ^^ 갑자기 얼마 전에 본 <마가렛트 여사의 숨길 수 없는 비밀>이
생각났어요.)
2016.05.25 00:44
2016.05.25 01:43
어니스트 섀클턴이 누군가 하고 찾아봤는데 남극 탐험을 하러 가셨던 분이군요.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일 자체에 별로 중요성도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있었더라도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숭고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어떤 일을 중요하게 만드는 건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태도인 것 같기도 해요.
다큐멘터리 영화 Man on Wire(2008)에서 줄 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감정이 생각났어요.
2016.05.25 10:13
전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요. <울지마 톤즈> 는 제목으로는 여러 번 들었는데 그 내용은 속속들이 알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얼마 전 버스를 타고 있는데 모니터에서 이태석 신부에 관한 영상이 나오더라고요. 관심이 생겨서 검색해 그분이 했던 일들을 내역 그 자체로만 읽는데 눈물이 점점 솟더라고요. 위인의 삶-슈바이처 박사와 같은-는 숭고하고 위대하긴 하지만 동시대가 아니라 그런지 동일시라거나 공감이 잘 되지는 않는데, 이태석 신부님은 저와 동시대를 사신 분이잖아요. 그런데 그분이 수단에서 벌인 일들은 정말 보통 사람이 먹기 어려운 두렵도록 굳은 마음가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똑같은 목숨 받아서 태어났는데, 이분 같은 사람은 이렇게 자기 목숨을 가치있게 쓰고 떠나고, 왜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밖에 삶을 사용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더해졌던 것 같아요. 더 서글픈 건, 이렇게 버스에서 울며 반성 비슷한 걸 하고 하차하여 귀가하면, '이렇게밖에 못 사는 '생활을 계속하게 될 것을 뻔히 알고 있다는 거였죠.
2016.05.25 11:57
영화를 보다가 가끔 성경 구절이 나올 때가 있는데 평소 성경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저도
맞는 말인 것 같아서 숙연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특히 사랑에 관한 구절은
(제가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태석 신부님 얘기는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자세히 모르는데 이번 주말에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2016.05.25 20:42
2016.05.25 21:22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누군가 하고 찾아봤어요. ^^ 멋진 그림들이 많은데
저는 해 뜰 때와 해 질 때의 풍경을 좋아해서 이번에는 해가 뜰 무렵의 그림으로 하나~
이번 주말에 <필사의 도전>에 한번 도전해 봐야겠어요. ^^ 3시간이 넘는 영화던데...
<콘택트>는 1997년 영화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영화예요. 이번엔 볼 수 있으려나요... ^^
Caspar David Friedrich - Easter Morning (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