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평행우주1)

2016.07.28 11:50

여은성 조회 수:889


  1.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거나 긴장하게 만드는 걸 좋아해요. 어차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거든요. 사람들은 돈이 많거나 매력있거나 그것조차 아니면 제 주제를 알고 아양을 잘 떠는 사람을 좋아하죠. 나는 저 세개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으니까요. 아마 잘해낼 수 없을거예요.


 하지만 이것도 괜찮아요. 어차피 잘해낼 수 없는 거면 잘해내려고 할 필요도 없는 거잖아요. 인생에 귀찮은 일을 하나 덜어낸 거죠.



 2.하지만 어쨌든 인간은 만나야 하니까요. 한데 돈이 많거나 매력있거나 붙임성있게 굴지 않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대해주는 사람을 찾고 싶었어요. 물론 일반인은 아니고요. 


 그래서 그런 계획의 일환으로 제작년~작년에는 새로운 곳에 처음 가면 맥주 한병으로 몇 시간씩 버티곤 했어요. 문제는, 마음에 들만한 곳은 대체로 맥주만 마셔도 되냐고 하면 그냥 나가달라고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너희들 손해지!'라고 약간 쇼맨쉽적인 동작을 취하며 외쳐주고는 다시 거리를 거닐거나 했어요. 


 사실 전 그냥 걷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어서 그렇게 하루를 때우는 것도 나쁘진 않았어요. 



 3.보통은 그런 시도를 할 때 가능한 허름한 옷을 입고 가게 돼요.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도산공원의 어떤 곳은 나가달라고 한 후에 내가 확실히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종업원이 따라붙기도 했어요. 그래서 뭔가 잔혹한 비웃는 말을 해줄까 하다가...그래 봐야 그걸 듣는 건 나이든 종업원이지 월급사장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말았어요.

 어쨌든 그런 취급을 받아 보니 '황금알을 첫날부터 낳아줄 필요는 없다. 네가 황금알을 낳아주지 않을 때 너를 어떻게 대접하는지 일단 지켜보라.'라는 나만의 술집 격언을 더욱 깊이 체화하게 됐어요. 

 그러던 어느날...


 4.휴.


 5.어느날 어떤 구석진 곳에 갔는데 많이는 아니고 조금 허름했어요. 테이블에 2팀 정도 있어서 혼자 일하는 바텐더가 좀 바빠 보였어요. 맥주만 마셔도 되는 곳이냐고 하니 그러라고 해서 TC를 안 받는 자리에 앉았어요. 그리고 맥주 한 병을 시켰죠. 

 한참 밤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들어간 거라 그런지 이미 있던 사람들은 곧 빠져나갔어요. 바텐더는 내 앞에 와서 앉더니 자신에게도 맥주 한 병만 시켜줄 수 있겠냐고 했어요. 유감스럽게도 돈이 없어서 안되겠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웠어요. 뭐 맥주 한 병 시키고 말벗까지 해주길 바란 건 아니라서 이대로 새벽까지 때우다가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다시 바텐더가 돌아왔어요. 초코볼이랑 무슨 크래커, 땅콩 같은 걸 가져와서 맥주랑 같이 드시라고 했어요. 고맙다고 하고 초코볼과 크래커를 열심히 먹었어요. 오래 걸어서 배가 고팠거든요.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바텐더가 남은 과일이 있는데 좀 썰어드릴까라고 물어봤어요. 괜찮다고 하자 바텐더는 어깨를 으쓱했어요. 


 6.바텐더가 아까 있던 사람들은 내일 출근 때문에 그만 가야 했다는 얘기를 꺼내고, 손님은 뭐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봐서 백수라고 대답했어요. 뭐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나는 완전히 거짓말인 말은 잘 안해요. 그리고 완전히 거짓말인 김치 공장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어요.

 지방 어딘가에 김치 공장이 있는데 돈이 떨어지고 할 것도 없으면 그곳에 가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가자마자 5천원은 소개료로 떼이고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출근해야 하는 곳인데 일이 굉장히 힘들다고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중국산 배추를 다듬는 얘기를 하며 좀 우울한 표정을 지으니 바텐더가 힘내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기분이 좋았어요.

 물론 이 김치 공장에 가본 적은 없어요. 아주 오래 전에 친구였던 사람에게 들은 얘기에 살을 붙여서 그냥 따라한 거예요. 


 7.하지만 그건 기분나쁜 기만적인 거짓말을 하려거나 그 바텐더를 속이는 재미를 느끼려 한 건 아니었어요. 그건 평행우주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내가 언젠가 어떤곳에선가 발을 헛디뎠었다면 살아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인생에 대한 거요. 그럼 정말 그 김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친구 소개를 받아 지방으로 내려갈 수도 있는 거거든요. 내가 내 힘으로 일자리를 알아보는 건 잘 못할 거니까요. 

 만약 그런 평행우주에 사는 내가 서울을 떠나기 전 어느날 바에 들어가서 맥주 한 병을 시키고 몇 시간이나 죽치고 앉아있는데 바텐더가 같이 먹을 안주를 가져다 주고 앞에 앉아서 격려도 해줬다면 정말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어요. 그게 이 우주에 사는 나의 기분도 좋아지게 만들어 줬어요.

 그곳은 대충 중구였어요. 그리고 중구쪽 바는 강남과 달리 늦게까지 하지 않아요. 그곳엔 주거지도 없어서 12시 이후면 공동화되고 고객들은 거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늦게까지 장사가 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곳 또한 늦게까지 열어봐야 2시 정도겠구나 싶었어요.   


 8.새벽 2시가 넘었는데 바텐더가 딱히 눈치를 주지 않아서 결국 제가 입을 열었어요. 여기 영업시간이 2시까지 아니냐고요. 바텐더는 그렇긴 한데 그냥 가고 싶을 때 가시라고 했어요. 

 이 일화를 이 글 안에서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너무 길어지네요.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 무법세계가 되어버린 평행세계에 살고 있는 나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나는 의도적으로 몸에 부하를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가야겠네요. 무법세계에는 감히 내게 덤벼오는 무법자들을 때려눕히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이 단련되겠지만 그런 교훈을 줄 무법자들이 없는 이 세상에선 운동이라는 귀찮은 걸 해야 몸이 단련되니까요.

 다음에 쓰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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