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일기...(이채연)

2019.01.13 14:55

안유미 조회 수:796


 1.종종 격투기를 배운다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하곤 해요. 인간이 가진 거라곤 팔 두개와 다리 두개뿐이라고요. 뭐 여자 격투가를 만나면 이 정도 말로 끝내지만 남자 격투가를 만나면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덧붙이죠. 그러니까 격투기를 배운 놈들의 재롱따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죠. 하하, 그야 반쯤은 허세예요. 격투기를 잘하는 놈들은 적보다는 친구가 되는 게 낫죠. 그야 나와 친구가 될지 적이 될지는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선택하는 거지만요.


 갑자기 격투기 얘기를 꺼낸 건 격투가 댄스와 비슷한 점이 있기때문이예요. 위에 썼듯이 인간에게는 팔 두개와 다리 두개밖에 없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동작 하나로는 감동-어떤 의미의 감동이든-을 줄 수가 없단 말이예요. 화가가 캔버스에 수많은 색을 쓰는 것처럼 댄서도 수많은 동작을 구사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춤을 배우다 보면 처음엔 어렵다가도 한가지는 이해하게 돼요. 그림은 빨간색 다음에 갑자기 푸른색이나 보라색이 나올 수 있어요. 하지만 격투나 춤은 어떤 동작 다음에 나올 수 있는 동작의 가짓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거죠. 아무리 힘과 유연성이 좋아도 다음 동작은 이번 동작과의 연결성과 필연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거예요. 다음 순간에 예상치 못한 굉장히 의외의 움직임이 나올 수는 있지만 어쨌든 인간의 몸으로 하는 건 반드시 이번 동작과 다음 동작간에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점...이건 중요해요. 대상을 해석할 때 미리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하면서 해석하고 분석할 수 있으니까요.



 2.프로듀스48에서 A급의 댄스실력을 꼽으라면 이채연, 권은비, 김초연, 손은채, 김현아 정도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댄스실력이란 건 단순히 춤을 잘춘다는 것이 아닌 춤을 안다는 점에서요. 프로듀스에서 수행해야 할 안무 정도는 연습할 것도 없어서, 자신의 연습 시간을 남들을 가르치는 데 주로 쓸 정도의 능력자 말이죠.


 프로듀스1시즌을 볼 땐 안무를 빨리 따는 사람들이 머리가 좋아서 저 복잡한 안무를 빨리 외우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춤 강습을 들어보니 그건 두뇌의 문제가 아니라 데이터의 문제라고 여기게 됐어요. 바둑도 그렇잖아요? 보통 사람들은 흰색과 검은색의 바둑돌들만 보면 대체 바둑판에서 어떤 일이 어떤 순서로 일어난 건지 감을 잘 못잡아요. 하지만 바둑을 잘 아는 사람들은 끝난 바둑판 하나만 보고 게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 어떤 순서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춤의 경우는 그게 더 확연하거든요. 개별 동작이라고 해봐야 패턴화가 되어 있는 거고 동작과 동작간의 연결성에는 소설이나 영화처럼 서사가 있어요. 장르 영화나 소설을 많이 본 사람들은 이제 여기서 누가 퇴장할지, 사건이 어떤식으로 전개될지, 범인은 누구일지, 어떤 타이밍쯤에 밝혀질지, 주인공 연인들은 언제쯤 키스를 할지 대충 감을 잡은 상태로 보잖아요? 데이터가 많이 쌓이면 쌓일수록 적중률은 높아지고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갑자기 엉뚱하게 갈 수도 있겠죠. 한데 춤은 역시 아니예요. 위에 썼듯이 인간의 몸은 다음 순간에 갑자기 불가능한 동작을 취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단련이 많이 됐다면 그 의외성의 한계가 넓어지지만 그래도 이번 동작과 다음 동작간의 개연성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안무를 따는 건 데이터가 많이 쌓이면 순식간에 해낼 수 있는 거예요.



 3.아 이런, 늘 느끼지만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전에 헛소리가 너무 길어요. 이채연 얘기예요. 사실 내 안목으로는 권은비나 이채연이나 김초연이나...잠깐 잠깐 클립을 본 것만으론 우위를 정할 수 없어요. 프로듀스48의 첫 평가 무대는 미술 대학으로 말하자면 1년 내내 준비해 온, 자신이 제일 잘하는 포트폴리오니까요. 셋 다 자신이 제일 잘하는 걸 1분 남짓 보여주니 나같은 사람이 보기엔 셋 다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거죠.


 그래서 내게 의외였던 건 권은비의 반응이었어요. 프로듀스48 1화에서 이채연의 무대를 보고 난 후 권은비의 말과 표정이 심각해지거든요. 더 열심히 연습해야겠다...라고 말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한다는 인터뷰를 했죠. 


 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정말 무서운 말이예요.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스테파넬 매장에 가서 가격표를 봤는데 150만원이면 놀라지만 구찌 매장에 가서 가격표를 뒤집어 봤는데 500만원이면 안 놀라잖아요. 구찌 매장에 가서 옷 한벌 가격 보고 놀라려면 일단 천만원은 넘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채연은 연습생들 사이에서 에르메스급 연습생으로 소문이 나있었단 말이예요. 에르메스가 에르메스급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건 권은비에게 전혀 놀랄 일이 아닐 테고요. 그런데도 이채연을 직접 보고 표정 관리를 못하는 권은비를 보고 궁금했어요. TV로 보는 건 그냥저냥인 것 같은데 정말 직접 보면 기대했던 것보다도 놀랄 만한 수준인 건가 하고요. 물론 권은비는 권은비니까, 아는 만큼 더 많이 보였을 수도 있겠죠.



 4.휴.



 5.그리고 어제 이채연의 생일 V앱-라기보다 생일 공연-을 보고 역시라고 생각했어요. 잘 한다...아주 잘한다가 아니라 춤에 대한 철학이 느껴져서요. 어떤 것을 오랫동안 열심히 해오면 거기엔 장인정신이나 철학이 담기잖아요? 낯간지러운 말일 수도 있지만.


 특히 춤은 직관적이고, 속임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래요. 예를 들면 커피는 좀 그렇거든요. 커피 장인이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자신이 커피 원두를 어떻게 가져오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 어떻게 볶는지...어떻게 추출해내는지 가게 관리는 얼마나 철저히 하는지 들으며 커피를 마시면 '한잔에 몇천원짜리 커피에도 철학이 들어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문제는, 그건 커피를 마시고 그냥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이 한잔의 커피를 만드는 데 얼마나 안 보이는 곳에서 노력하는가...일장 연설을 들어야만 느껴지는 거거든요. 내가 막입이라서 커피만 마시고는 못 느끼는 걸수도 있지만 하여간 그래요.



 6.그런데 이채연의 춤을 보니 그냥 알 수 있었어요. 사람 붙잡고 '아 이보세요 내가 밤새가면서 연습을 하루에 열몇시간씩 해서 이렇게 잘하게 됐어.'하는 거 없어도 잘 알수 있었죠. 그녀가 춤을 잘 추기 위해 모든 단계에서 철두철미하다는 거요.


 위에 썼듯이 그렇거든요. 동작과 동작 간의 연결에 의외성과 놀라움...감동을 주려면 단련해서 표현의 한계를 넓힐 수밖에 없어요. 넓히고 넓혀서, 불가능해 보일 정도까지 가야 다른 사람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는 거죠. 


 이채연이 춤을 추기 위해 해놓은 밑준비...강력한 코어 근육과 하체, 유연성을 보면서 마치 최고급 원테이블을 운영하는 셰프를 보는 것 같았어요. 요리를 하기 전에 제일 좋은 재료부터 구하기 위해 며칠 동안 뛰어다니는 셰프 말이죠. 그리고 최고의 재료가 손에 들어온 뒤에야 최고의 조리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셰프 말이죠. 최고의 요리란 건 최고의 재료만으로도, 최고의 조리 실력만으로도 나올 수 없는 거니까요. 그 두가지가 다 준비되어 있어야 하죠. 



 7.그리고 춤이란 건 속임수가 없어요. 무슨 말이냐면, 기술의 발전에 따른 속임수가 없다는 거죠. 요즘 세상은 그렇잖아요? 진짜 기자보다 기자 흉내를 잘 내는 놈이 인정받고 진짜 평론가보다 평론가 흉내를 잘 내는 놈이 인정받죠. 진짜 날카로운 논객보다 날카로운 척을 잘 하는 놈이 논객으로 팔리고 있고요. 진짜로 노력하고 얼마간이라도 내공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그럴듯한 흉내를 잘 내는 놈이 소비하기 편하니까요.


 그림이나 음악도 그래요. 온갖 프로그램과 툴, 소스가 널려 있는 세상이니까 개인의 어렴풋한 창의성은 실체화시키기 쉬워지고 단점들은 쉽게 숨길 수 있거든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어렴풋한 것을 실체화시키는 데 긴 수련 기간이 필요하던 시절이 꼭 좋다는 아니예요. 


 그러나 내가 위에 쓴 것처럼 나 정도의 일반인은 봐도 잘 모르거든요. 잠깐 잠깐씩 편집되어서 화려하게 전시되는 세상,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긴 시간을 주지 않는 세상에서는 정말 좋은 걸 판별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춤은 역시 기술이 발전하든 뭘 하든, 연습해야만 잘할 수 있단 말이예요. 현대 미술처럼 붓을 입에 물고 선 몇개를 그리거나 몸에 물감을 바르고 캔버스 위를 뒹구는, 날로 먹는 짓거리를 못 한단 말이죠. 


 그래서 어제 이채연의 V앱을 보며 내일은 피트니스에서 빡세게 운동할 거라고 마음을 먹었어요. 오늘은 팔을 팔꿈치 위 이상으론 들어올릴 수 없을 때까지 운동을 할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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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이채연 글에 썼었죠. 이채연은 누군가에게 인스피레이션을 주며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우리의 차이라고 말이죠. 나도 이채연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이채연을 단순한 기쁨을 넘어 남들에게 영감을 주며 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곤 해요. 


 원래 주식 얘기를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쓰려고 했는데 오늘은 일기가 길어졌으니 그걸 설명하는 걸 그만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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