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위의 도박중독자들을 보고 궁금했던 건 이거예요. 어째서 다른 중독들과는 달리 도박은 '무제한으로' 중독되는 걸까요? 왜 몇년...수십년 씩 무제한으로 중독되어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술이나 마약처럼 몸에다가 유기화합물을 털어넣는 것 말고 순수히 정신적인 중독...탐닉적인 행위를 따져보자면, 다른 중독들은 언젠가는 벗어나거나 질려버려서 그만둘 수 있게 돼요. 게임중독이든 유흥중독이든 쇼핑중독이든 말이죠. 


 이 '질려버린다'라는 점이 중요해요. 아무리 좋았던 자극도 계속 받으면 질려버린단 말이예요. 게임을 하다 보면 '대체 내가 왜 이딴 데이터 쪼가리를 붙들고 시간을 매몰시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죠. 



 2.유흥 중독도 그래요. 돈을 내고 왕 대접받는 것도 몇년 하다 보면 모든 게 매뉴얼화 되어버려요. 호스티스들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매크로 같은 느낌이 들고 아무리 잘 해줘도 질리게 되는 거죠. 유흥을 몇년 다니면 그녀들이 치는 멘트나 표정이나 모든 게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되는 때가 오거든요. 그러면 '대체 내가 왜 이딴 여자들에게 돈을 쓰고 있는 거지?'라는 현타가 오죠.


 

 3.쇼핑 중독도 그렇고요. 선물을 사러 사치품 매장에 가 보면 쇼핑 중독에 왜 걸리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요. 얼마쯤은 유흥 중독이랑 비슷한 게, 샤넬 매장에 들어가면 와꾸 좋은 사람들이 깎듯하게 굽신거리면서 응대해 주거든요. 물건을 하나 보여줄 때도 장갑을 끼고 정말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보여 주고요. 그래서 쇼핑 중독이란 건 구매한 물건을 과시하는 것도 있겠지만,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얻는 쾌감도 조금은 있는 거죠.


 하지만 그것도 계속 반복하다보면 글쎄요. 쇼핑 중독을 일상의 일부분으로 내재시킬 능력이 되면 괜찮겠지만 쇼핑 중독이 재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결국 현타가 오겠죠. 이런 기분 잠깐 느끼자고 이 돈을 쓰나...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요.



 4휴.



 5.여기서 도박 중독과 다른 중독들과의 차이점은 그 부분인 것 같아요. 흔히 말하는 현타...현자타임이란 것은 그 분야에서 어느정도 성공했거나 승리했거나 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거든요. 아니면 어느 정도의 보상은 얻었거나요. 왜냐면 사람은 얻고 싶은 것을 얻었을 때 허무감을 느끼니까요. 얻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게임 중독이든 유흥 중독이든 쇼핑 중독이든 얼마쯤 구력이 쌓이면 그 사람은 빠꿈이가 돼요. 특히 그게 인간관계와 연결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죠. 게임 중독은 어쨌든 게임 캐릭터도 강해지고, 본인의 게임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도 높아지고 게임 커뮤니티 내에서 제법 알아주는 유명인사가 될 수도 있는거예요.


 유흥 중독도 몇년 다녀보면? 강남은 어떻고 강북은 어떻고 강서는 어떻고 강북은 어떻고 중구는 어떻고...다 꿰게 돼요. 어떤 지역은 어느정도 외모가 되는 사람들이 일하는지 가격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다 알게 되고요. 가끔씩 사장들이나 호스티스들이 먼저 연락와서 생일도 챙겨주게 되죠. 비록 화류계긴 하지만 어느정도 존중은 받는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거죠.


 쇼핑 중독도 그렇죠. 계속 백화점에 다니면서 쇼핑 내역 쌓으면 어찌됐든 백화점 vip라운지도 갈 수 있게 되고 카탈로그도 날아오고 뭐 그래요. 아무리 헛돈 쓰는 것 같아도 돈쓴 것 만큼은 뭔가 인정받고, 챙겨주는 듯한 느낌은 받을 수 있는거예요.



 6.개인적으로는 호텔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호텔에 가면 로비에서 체크인을 할 때 지루한 설명을 주욱 하죠. 라운지는 언제언제 있고 체크아웃은 몇 시고 와이파이 비번은 뭐고...이런 것들이요. 그건 몇 번을 가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같은)호텔에 여러 번 가면 설명 들어가기 전에 '물론 많이 와보셔서 아시겠지만-'같은 인사치레를 해 주거든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부분에서 어깨가 으쓱해지곤 하는 거죠. 같이 체크인하는 여자 앞에서도 목에 힘좀 들어가고요. 어쨌든 도박과 달리 다른 종류의, 재정적 부담이 가는 중독들은 어느 정도 챙겨주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뭐가 어찌됐든 손님인 거니까요.


 

 7.하지만 그렇게 그곳에서 나름 빠꿈이가 되고 대접 좀 받아보면 끝내는 현타가 오는 거예요. 결국 이리저리 따져보면 쓰는 돈과 얻는 보상의 갭이 크다는 걸 느끼게 되니까요. 몇백만원 내고 뽑는 캐릭터 하나...누군가의 한달 월급쯤은 되는 돈을 깔아주면서 하룻밤 대접받는 것...괜찮은 가방이랑 옷 여러개는 살 수 있는 가격에 사는 핸드백 하나...이런 것들에 계속 돈을 쓰고 있다보면요. 그리고 결국 냉정해질 수 있고, 그만둘 수 있게 되는거죠.



 8.하지만 도박은 그렇지가 않아요. 일단 그곳에서 성공을 하거나 괜찮은 보상을 받는 게 없거든요. 강원 랜드에 가서 몇년씩,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박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강원랜드의 페이커가 될까요? 스타크래프트 실력이 늘듯 도박 실력이 늘까? 전혀 아니거든요. 하다못해 존경받거나 인사치레도 못받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카지노를 상대로 이길 수 없어요. 어쩌다 하루 이틀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도박 중독에 걸려서 계속 도박을 하면? 그 누구도 도박장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는 거죠. 상대 전적에서 도박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애초에 도박에서는 현자타임이란 게 없는 거예요. 나의 경험상 현자타임이란 건 그 분야에서 일정 이상 전과를 올렸을 때에야 찾아오는 법이거든요. 어떤 분야에서 계속 실패만 거듭하고 있으면 현자타임은 안 와요. 사람은 얼마간이라도 성공을 맛봤을 때 냉정해지고 허무감을 느낄 수 있는 거지 실패했을 때 냉정해지긴 힘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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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이 지나가고 월요일이 되는 밤엔 늘 적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 주를 준비할 시간인데 내겐 가장 말똥말똥하고 할것도 없는 시간이죠. 다른 시간들은 무언가로 채워넣을 수 있지만 일요일-월요일로 넘어가는 시간은 좀 그래요. 


 이런 때는 도박이라는 괴물을 만나서 원래의 인생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각나곤 하죠. 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걱정했던 사람들이 말이죠. 잘 모르겠어요.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도박이라는 악마를 만나본 적이 없겠죠. 그건 좋은거고요. 도박이라는 악마와 엮이지 않는 건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좋은 인생이죠.


 하지만 도박이라는 악마를 만나고...헤어질 수도 있었지만 또다시 굳이 만나러 찾아간 사람들은 좋은 인생으로는 재미가 없었던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결국은 그 좋은 인생을 배팅했다가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들은. 


 그리고 그 좋은 인생을 돌려달라고 악마를 또다시 찾아가는 바보짓을 계속하고 있는 거죠.


 사실 도박도 무섭지만 '도박'과 '도박장'은 내가 보기에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이 도박인데, 그 도박을 다른 중독자를 상대로도 아니고 도박장이라는 시스템을 상대로 벌이면 100% 지는 거거든요. 적어도 다른 중독자를 상대로 도박을 했다면 두 중독자 중 한 중독자는 승리자가 됐겠죠. 


 아니...역시 아닌가? 시스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했어도 결국 안 좋은 결말을 맞게 됐겠죠. 타인을 상대로 하는 도박이라는 건 져도 문제고, 너무 크게 이겨도 문제가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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