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의 부조리

2021.08.02 13:22

Sonny 조회 수:720

저는 군생활을 나름 운이 좋게 했던 편입니다. 강원도 철원에서 했던 건 '별로 운좋은 건 아님' 이었지만, 제가 딱 입대할 때쯤에 제가 있던 소대의 행정보급관이 모든 구타를 전면금지시켰거든요. 덕분에 저는 군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때리거나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그 행보관이 군인 인권을 신경쓰는 사람이어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는 정말 진급에 환장해있는 워커홀릭이었기 때문에 '우리 부대는 이렇게 변화에 발빠르다' 라고 대외적인 홍보를 하고 싶어했고 '내 진급에 누를 끼치는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통제를 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행보관이 구타를 싸그리 없애버렸지만 그래도 그 잔재를 살짝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등병 1개월 쯤에는 그런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너희는 진짜 좋은 세상에 산다, 네 4개월 선임인 누구만 해도 별의별 짓 다 당하고 그랬는데.' 주특기 훈련을 하는데 성적이 제대로 안나오면 겨울철에 상의탈의를 하고 엎드려있으면 선임들이 물뿌리개로 등 위에 물을 쫙 뿌려준다는 걸 이야기해주면서 이렇게 하면 진짜 정신번쩍 들어서 주특기를 못할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저는 본부 소속이었는데 옆에 있던 알파 브라보 찰리 소대들은 제가 전역할 때까지도 구타가 있었습니다. 그 쪽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선착순 달리기 이런 건 기본이고 말 안듣는 놈들은 어디를 때려야 흔적도 안남고 직빵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그런 말들을 했으니까요.


그런 잔재 속에서도 행보관의 그 강력한 조치에 누구도 딱히 반기를 들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구타는 나쁜 일이었고, 애초에 규정이 그렇게 정해져있었으며, 구타의 당위나 필요성에 대해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등병 때 어떤 병장이 영창 갔다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 병장은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었고 딱히 후임들을 괴롭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후임이 자기를 때렸다며 행보관에게 보고를 했고 그 병장은 찍소리도 못한 채 영창을 다녀오더니 전역 때까지 알맹이가 빠진 허수아비처럼 시들시들한채로 있다가 나가더군요. 후임을 괴롭히거나 독재자처럼 구는 선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있었는데 후임을 때리는 일은 그 영창갔다온 선임 이후로 한명도 없었습니다. 일벌백계가 제대로 먹혔던 거죠.


놀라운 건 그 선임 이후로 '누군가를 때리는 일'이 저희 소대 내에서 아예 쓰레기 취급받는 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하면 안되지만 몰래 이따금씩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면 행보관이 아예 선포를 한 뒤로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되었고 그 선임이 영창을 갔다온 뒤로는 '사람을 때리는 놈이 한심하고 멍청한 인간이 되는 그런 쪼다 짓거리'로 인식이 바뀌어버린 거죠. 사실 조직 내에서의 문화란 규정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일이 왕왕 있는데 역으로 부대내 구타금지는 규정이 문화를 완전히 뒤집어버렸습니다. 금기가 되었어도 그 금기를 문화적으로는 옹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 부대내에서는 그게 아예 언급할 필요도 없을 만큼 후진 게 되어버린 거죠. 예를 들어 친한 사이의 상병과 일병이 서로 장난을 친다고 하면 이런 대화들이 오갔습니다. 친하니까 선임이 후임을 장난으로 어깻죽지 같은 곳을 툭툭 칠 수는 있잖아요? 그러면 맞은 후임이 막 오버를 합니다. "와~~ 이 이 구타를 이렇게 하고 000 상병님 완전 저질이십니다 보고해야겠네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 '그 정도는 때릴 수도 있지 않느냐' 라는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 놈이 나를 구타나 하는 쓰레기로 선동하네~~"라고 반응하며 서로 웃고 그랬죠. 구타의 정도를 논하면서 그걸 허용하는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구타를 인간적 실패로 놓는 전제를 공유하면서 대화를 했죠...


그 때를 생각하면 사회적 변화가 절대 아래서부터, 대다수의 합의를 통해 이뤄져야한다는 의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곱씹게 됩니다. 그 당시 군대 내 구타와 가혹행위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거세긴 했습니다만, 그 어떤 병사도 스스로 '우리가 더 이상 사람을 때려선 안되겠다'라며 변화를 도모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때릴 수 밖에 없는 경욷 있는데 이걸 어떡할 거냐고 주장한 다른 병사들과 논의를 한 적도 없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고, 그 인권훼손에 대한 보도가 이루어졌었고, 자발적인 변화의 싹은 보이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인권침해가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럴 때는 실권자가 일을 밀어붙이는 게 훨씬 더 빠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갑론을박 따위에 시간을 소모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제도의 문제는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사회적인 합의보다 법적인 규제가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저희 부대에서 행보관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습니다. 절대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그랬으면 병사들이 휴가가는 걸 자기 마음대로 날짜 조정하고 9박 10일 휴가를 짤라서 4박 5일째에 들어오라고 그랬겠습니까) 온정 가득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강행한 그 규정이 저희 부대를 훨씬 더 살기 좋은 환경으로 바꿔놓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부대는 제가 전역한 이후에도 계속 구타 금지로 남아있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행보관이 남아있었으니까요. 


병사 시절 온갖 고초를 겪어가며 부조리를 바꿔보려 했지만 몇개월만에 원상복귀 했다는 글들을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도 꽤 봅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나 안타깝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욕하면서도 결국 한 사회의 변화는 권력과 제도가 법적으로 뭔가를 바꿨을 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걸 실감합니다. 어쩌다보니 철인정치를 옹호하게 되는 것 같은데 하고자 하는 말은 사실 한 가지입니다. 사회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이유없는 불쾌감만으로 논쟁을 요구하는 이들보다 그 당위적 문제에 생존이 걸린 당사자들을 이해하고 일을 추진하는 사회제도적 변화가 더 시급하다는 것입니다. 


@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신념을 지켜가며 선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분들은 존경합니다. 모든 혁명은 지속적 실패와 찰나의 성공으로 이뤄졌다는 말씀을 그분들께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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