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재밌게 보고 왔다고 하는데 짝꿍이 호기심을 가지는 바람에 데이트무비 정도로 생각하고 봤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큰 패착이었지요. 한국영화는 가급적이면 보지 않는다는 원래의 주관에 충실했어야 했는데. 

재미있게 보셨다는 분들도 이해는 합니다. 번지르르하게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긴 하니까요. 

다만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아직도 삽질을 반복하고 있는 2022년의 한국인 입장에서 안기부 직원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아무리 여러가지 설정을 촘촘하게 깔아놓았다 한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습니다.

헐리웃 영화나 드라마에서 CIA나 그밖의 대국가정보조직을 다루는 것과는 비교되어서도 안 되고, 그럴 수 있는 성격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인가요? 무슨 드라마에서도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주인공이 '강직한 안기부 요원'이라는 설정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도 정확히 같은 지점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이걸 보고 즐거움을 느끼기에는 현대사는 너무나도 많은 사건과 현장에 억울한 피와 눈물과 땀이 서려있잖아요. 

그리고 그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고요.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은 정우성이 분한 캐릭터 김정도였습니다.

5.18 현장에서 전두환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을 느꼈다 한들 그가 추구하는 방향은 그래봤자 제3의 군사 쿠데타 아닌가요? 

계획이 성공해서 정권을 쥐었다 한들 거기에 무슨 놈의 말라비틀어진 '민주주의'가 있습니까? 

군사 쿠데타로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1960년대 초에도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실제로 5.16 이후 다수의 지식인층이 일말의 기대를 걸고 박정희의 쿠데타를 긍정하거나 환영했던 적이 있지요. 

아직은 친일지주정당의 색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데다가 4.19 혁명을 완수하고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는 철저히 무능했던 민주당에 비하면

박정희는 좌익 전력도 있겠다(네에 그때는 그게 나름 매력 포인트였더랍니다) 빈농의 아들이겠다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죠.

더구나 그때즘 전세계적으로도 제3세계에서는 구국 쿠데타가 잇따르던 시기였기도 하니까요. 

그렇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이제는 우리가 이미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전두환이 군부독재자에 학살자였던 건 맞지만, 그 전두환을 제거하려고 한다 해서 거기에 민주 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건 지나친 흑백논리 아닐까요.

전두환을 제거하려는 군부의 음모라고 한다면 현실적으로는 그저 정적을 제거하고 본인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한 암투 정도가 고작이죠. 

더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김정도가 한 짓을 봐요. 이정재 캐릭터였던 박평호가 해외 담당이라면 김정도는 국내부서였지요. 

그 시절 안기부 국내부서가 어떤 대공업무를 했는지 모르지 않지 않습니까. 무수히 많은 날조와 고문과 그리고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경제적 부정까지. 

영화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이 몇 군데에서 등장하긴 하지만, 너무 가벼웠고 사변적이었습니다.

그쵸 이 영화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저 두 남성의 찐하게 얽히고 동시에 어긋난 관계에 초점이 가 있으니까요.  


조유정 캐릭터 설정도 심각하게 틀려먹었죠. 1950년대부터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시절에 일본의 존재가 꽤 큰 역할을 하기는 했습니다. 

지명관이 TK생이란 필명으로 한국의 사정을 알리던 것도 일본의 잡지 지면을 통한 것이었고요.

특히 기독교가 매개가 되어 일본 기독교계와의 공조를 통해 전세계로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또 필요한 경우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납치된 현장이 일본이었던 것도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때 정치적 격랑을 함께 겪었던 자이니치, 혹은 일본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한국계 인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박평호의 일본 활동 당시 현지 정보원으로 자이니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은 역사적 개연성이 높지요.

다만 실제로 그런 활동(반독재민주화운동)을 하던 자이니치들이 간첩으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는 경우도 흔했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민족일보 사장인 조용수가 있지요. 

물론 당시 자이니치 사회에 북한정부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거기 어딘가에 남한을 대상으로 한 공작원들도 당연히 활약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조유정이 북한에 포섭된 남파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거기에도 어느 정도의 역사적 개연성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거에요. 조총련계는 남한 정부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북한정부와 상대적으로 가까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데

그런 배경은 싹 빼고 단순히 북한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친북, 빨갱이, 간첩 딱지를 붙여오던 과거가 아직 엄연히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다순히 막판의 반전적 요소로 써먹어버리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요. 

그렇게 되면 조유정 캐릭터의 입을 빌어서 했던 안기부에 대한 비판도 의미가 퇴색해버리고요.


마지막으로 북한의 존재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이 영화 세계관에서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북한은 거의 데우스액스마키나에요. 

여전히 분단 국가인 현실에서 북한은 때로는 굉장히 폄훼되고(아직도 북괴란 표현을 쓰는 젊은이들이 있더군요 인터넷 공간에서긴 하지만)

또 필요시에는 무슨 테러와 공작 활동을 전세계를 무대로 누빌 수 있는 능력자에요. 그 사이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전반적으로 영화의 전개를 위해 능력치가 상향 평가된 와중에, 그렇지만 북한에 대해 너무 긍정하면 안 되겠기에 여기 나온 북한 사람들은 이웅평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몰인정하고 목적에만 충실한 냉혈한들이지요. 

이건 뭐 미드 기묘한이야기 3시즌에 소련이 나와서 황당했던 것보다 더 심해요. 그때도 유치했지만 그나마 소련은 이미 무너지기라도 했지. 

영화의 설정만 보자면 북한의 존재는 그저 편리하게 이용해먹는 가상의 적국 같은 느낌인데, 근데 문제는 북한이 실재한다는 거죠. 

비슷한 설정에 비슷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차라리 가상의 세계관이거나 판타지거나 했으면 오히려 재밌게 볼 수 있었을까요. 

아직도 분단의 모순이 이 나라를 고통에 빠트리는 현실에서 이런 영화는 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영화 자체가 굉장히 반공 프로파간다로 느껴질 뿐입니다. 


근데 사실 한편으로는 이해는 합니다. 독립운동 하면 유관순 안중근 김구를 먼저 떠올리는 수준의 얄팍한 역사적 의식에서는 뭐 이 정도면 훌륭한 영화인 거죠. 

일제강점기 인물은 독립운동 아니면 친일이어야 이해할 수 있고 

대한민국이 정치적 사상적 자유가 있는 국가여도 여전히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대중들에게는 

5.18 문제도 건들어주고, 전두환 욕도 실컷 해주고, 안기부의 대공 사건 날조에 대한 욕도 좀 해주고, 그런데 어쨌거나 북한은 나쁜 놈이 맞다고 하니 마음 불편할 것도 없고 

대중적으로 안전한 설정이었겠죠. 저 같은 빨갱이 불평쟁이들 시각에서나 걸리는 거지.. 안 그렇습니까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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