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의 [사무라이](1980)는 앞서 읽은 [침묵](1966) 보다 한참 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두 소설이 다 실제 사료를 바탕으로 했다고 하며 소설 속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시기는 [사무라이](1600년 초)가 조금 앞섭니다.

[침묵]은 포교를 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포르투갈 신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였는데 [사무라이]는 하급 무사인 하세쿠라와 사절단 통역을 맡은 스페인 신부 벨라스코 이 두 사람의 시선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세쿠라이고요. 아래 문단부터 최종 부분만 빼고 내용을 다 언급합니다.


하세쿠라는 아버지 대에 위의 명으로 고향 땅에서 내쳐져 수확할 것도 변변찮은 척박한 골짜기 땅을 배당받아 마을 사람을 이끌고 살고 있는 하급 무사입니다. 풍요롭던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가진 늙은 숙부와 달리 하세쿠라는 아무리 일해도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한 땅이지만, 골짜기에서의 삶에 만족합니다. 일본 소설이나 영상물을 보며 생각한 것인데, 분수를 안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 아주 중요한 덕인 것 같아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 삶에 만족 못하고 불만을 가지거나 어떤 사안에 비판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거 같습니다. 나아가 혐오하는 거 같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하세쿠라도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말없이 받아들이며 인내하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세쿠라도 일이나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인물은 속으로 싫어하는, 그러한 성격의 인물입니다. 


일본에서도 구석지고 척박한 땅에서 세상 모르고 골짜기에 붙어 식솔들의 끼니 해결에만 몰두하던 하급 무사 하세쿠라가 어째서인지 멕시코와의 무역을 트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이 되라는 명을 받게 되고 난생처음 큰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게 됩니다. 윗 분에게, 왜 저일까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임무를 완수하면 고향 땅을 되찾을지도?(어쩌면!) 어찌 되었든 명을 받았으니 명을 따른다, 입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을 배에 태워 멕시코로 보내는 것이 토착 식물을 뿌리 뽑아 배에 던져넣는 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이 일의 은폐된 전모를 이 단계에선 아직 모르고 있지만 상황에 대한 이해나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이 배에 실린 순진우직한 하세쿠라에 연민이 생깁니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함께한 종자 요조가 붙어 있어 하세쿠라는 여정 내내 마음으로 크게 의지를 하게 됩니다. 하세쿠라와 처지가 같은 하급 무사 셋이 더해져 총 네 명의 사절이 통역자인 신부 벨라스코와 여정에 오릅니다. 배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폭풍으로 표류하여 일본에 있던 스페인 선원들이 일본 선원들에게 항해 기술도 전수해 주며 배를 운전합니다. 일본 상인들도 수십 명 함께 타고 출발합니다.


배가 출발하기까지 분량이 소설의 오분의 일 지점입니다. 고생스런 항해 끝에 아카풀코를 거쳐 멕시코시티로 가서 총독도 만나지만 총독은 통상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 힘이 없으며, 그 과정에 사절단은 환영받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상인들은 벨라스코의 의도대로 멕시코시티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가져온 물품을 처분할 수 있게 되고 새로 구입한 물건들을 싣고 사절단 한 명과 함께 일본에 돌아갑니다. 세 명의 사절과 벨라스코는 멕시코와의 무역에 조금이나마 긍정적 성과를 가지고 가기 위해(벨라스코의 교묘한 희망고문에 의해...) 멕시코를 움직이는 실세인 마드리드로 가기로 합니다. 험한 고생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베라크루스, 대서양 항해, 세비야, 마드리드. 마드리드에서 사절단은 정식 사절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하여 멕시코와의 통상을 트는데 힘을 싣기 위해 세례도 받습니다. 세례 받기를 결심한 후 하세쿠라는 임무 수행을 위한 형식적인 것이다, 라고 가책 속에서 틈날 때마다 중얼거립니다. 마드리드에서 이들은 아무 희망이 없어진 후에도 최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로 로마까지 가고 형식적인 것이지만 교황을 접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람도 없이 같은 길을 되짚어 돌아옵니다. 4년이 걸린 여정이었어요. 소설의 오분의 사가 지났습니다. 일본에 도착하니 이야기는 80페이지 정도를 남겨두었습니다.


오직 자신이 잘 하는 인내와 순종의 의지 하나로 세상 끝에 다녀온 하세쿠라는 이 여행이 끝나고 일본에 도착한 이후에 비로소 각성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급 무사로서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분수를 아는 것만으로는 대처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었던 세상일에 대한 각성입니다. 이는 머리를 강타하는 형식이 아니고 깊은 밤에 이로리 옆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혼자 앉았을 때 종이에 물이 젖듯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이상이 있을까 싶었으나 더 외지고 더 외롭고 더 무시당하는 처지가 되자 방문했던 나라의 집집마다 걸려 있던 철사처럼 야위고 힘없이 두 팔을 벌린 채 못 박힌 사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저렇게 추하고 볼품없는 사람에게 이들은 머리를 수그릴까, 볼 때마다 의아했던 사내의 모습입니다. 이제 골짜기의 한밤에 홀로 앉아 떠올리는 그 모습은 예전처럼 멸시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고 그 가련한 사내가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이야기가 벨라스코와 하세쿠라 두 사람의 시선으로 전개된다고 했는데 하세쿠라 입장에서만 내용 정리를 해 보았어요. 벨라스코는 일본에 교구를 만들어 주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이 사절단이 꾸려지도록 분위기를 만들지만 에도와 영주의 속마음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본인이 조정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출발 이후엔 사절단을 어르고 속여서 여정이 로마까지 이어지게 도모합니다. 사제이지만 천성적으로 오만한 기질이 있으며 선교에는 외교적 수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진적인 것이 후진적인 것을 물리쳐 줘야 하고 돕는다는, 침략군과 함께 들어오는 선교사의 전형성이 있습니다. 무적함대의 문화에서 성장하고 신앙을 키웠으므로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지만요. 벨라스코와 대척점에 어쩌다 멕시코까지 흘러들어와 인디오의 마을에 함께 사는 일본인이 등장합니다. 전직 수도사인데 스페인이 인디오에게 저지르는 짓을 보고 교회에서 이탈한 사람입니다. 예수는 큰 교회가 아니고 비참한 인디오 안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며 그냥 인디오가 되어 살고 있어요. 이 사람의 말과 신앙에 대한 메모가 하세쿠라의 마음에 드문드문 은연중에 영향을 끼칩니다.    


해설에 보니 엔도 슈사쿠가 이 소설 관련 인터뷰를 하며 '이 소설은 저의 사소설 같은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작가가 어릴 때 세례를 받고 교회와 거리를 두다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로 유학을 한 경험을 연결지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보다는 동아시아인이면서 기독교인이면 어느 정도는 생각해 봄직한 문제 - 외래 문화로서의 기독교를 어떻게 내면화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내면화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경로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소설의 제목이 참 묘한 것이 일본에서 특정 시기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모시고 섬긴다는 뜻인데, 소설속에 나오는 하세쿠라 식의 소박한 표현(일종의 신앙 고백)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아요.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는 평생 함께해줄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을 - 설령 그것이 병들어 쇠약한 개라도 좋아 - 찾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겠지. 그 사내는 사람에게 그런 가련한 개가 되어주는 거야.' 

이 소설에서 병들어 쇠약한 개와 종자인 요조와 예수는 동일합니다.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 참견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존재입니다. 

저에게는 나이들고 병들어 쇠약한 개가 있네요. 아직 잘 버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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