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립교향악단 - 아리랑]
2000. 8. 22. 서울 KBS홀 남북합동연주회 공연실황 (C) 2000 KBS


2008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에서, 공연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는 곡으로 '아리랑'이 연주된 적이 있었습니다. 약 9분 정도의 1악장짜리 짧은 조곡으로 편곡되어 있는 클래식 버전인데, '미국의 오케스트라가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상징적 의미 덕택에 많은 뉴스매체들이 이를 비중있게 다루었죠. 그 때문에 아마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번역사이트 개소문에 며칠 전 다시 올라왔더군요.) 하지만 이 곡은 사실 뉴욕필의 오리지널은 아니고, 북한의 음악인들이 편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뉴욕필 측에서 없던 곡을 새로 쓴 것처럼 보도한 뉴스도 있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사실관계가 틀렸습니다.


또한 이 곡이 지난 2000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연주되었고, 방송 전파를 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당시 KBS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이 KBS홀과 예술의전당 등에서 협연을 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재생되는 음악이 바로 그 공연 실황입니다.

2000년 여름 당시, 중계방송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시간에 라디오에 잡히는 TV방송 전파를 들으며 녹음을 해 두었습니다.

(*KBS1 TV는 국가기간방송의 특성상 일반 FM라디오로 들을 수 있는 주파수 대역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TV방송은 그보다 좀 더 낮은 대역폭을 쓰기 때문에 일반 FM라디오 튜너의 범위(87.5MHz~108.0MHz)로는 잡을 수 없더군요. 예외가 있다면 서울 일부 지역에서 SBS-TV가 잡히는 정도.)


그 당시에 녹음해 둔 카세트테이프가 남아있어서 디지털 컨버젼을 했습니다만, 제대로 된 안테나 장비도 없이 워크맨에 이어폰으로 전파를 수신하던 상황인데다가 건물의 콘크리트 벽에 전파방해를 받다 보니 녹취된 결과물에 노이즈가 잔뜩 끼어 있습니다. 삼가 듣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2000년 당시에 하이텔에 저 당시의 공연실황을 SD급 MPG로 떠서 올리신 분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KBS미디어측에 정식으로 프로그램 전체를 구매 의뢰하지 않으면 소스를 구할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후에 KBS측에서 남북 관련 영상물의 BGM으로 가끔 이 음원을 쓰긴 하더군요.)

어쨌든 (좀 열악하긴 하지만) 이 소스를 지금에 와서 굳이 올려보는 이유라면, 이 '오리지널 버전'과 '뉴욕필 버전'의 두 아리랑을 비교해볼 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겠죠.

글 첫머리에서 9분대의 조곡이라고 언급했습니다만 조선교향악단 연주는 약 8분 가량입니다. 그리고 이번 뉴욕필하모닉의 연주는 9분 10여 초 정도로, 조금 더 연주시간이 깁니다.

여기 첨부한 공연실황 영상을 보시면 확인할 수 있겠지요.



2008. 2. 26.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동평양대극장 공연실황 (C) MBC/EUROVISION 2008



모든 음악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클래식은 지휘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오케스트라를 연주해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그 인상이 다릅니다. 예컨대 같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라 해도 BBC 필하모닉의 자난드레아 노세이다 지휘와 빈 필하모닉의 카를 뵘 지휘는 첫머리부터 느낌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 후자의 경우는 좀 더 장중하고 느리죠. 또한 '합창'교향곡의 경우는 지휘자의 곡 해석에 따라 전체 연주시간이 많게는 7~8분 가량 차이나더군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정명훈씨가 약 70여 분 가량이고 다른 지휘자들은 그보다 좀 빠르게 진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들었던 BBC 필하모닉의 맨체스터 공연실황은 방송용으로 맞추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템포가 약간 빠르고, 따라서 플레이타임도 62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보니 필립스가 CD 규격을 발표할 때 74분으로 잡은 것은 바로 이 합창교향곡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기준을 정했기 때문이라던가요?)

그러한 곡의 전체적 템포에 의해 연주시간이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아리랑'의 경우는 후반부의 해석을 완전히 다르게 한 경우에 속합니다. 당시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곽승 씨(이 곡은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연주했으나 북측 상임지휘자인 김병화씨가 아니라 KBS측 상임지휘자의 지휘로 협연됨)는 곡 구성의 전환점을 지나 '갈등'이 해결되어 나가는 부분에서 마치 왈츠를 추듯 가볍고 빠르게 곡을 해석하여 전개해 나갑니다. 반면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 메타는 전체적인 곡 해석도 느릿하고 부드럽게 진행하면서 뒷부분 또한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악보를 보지 않아서, 이게 원래 총보 자체가 템포가 다른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

생각건대 이 두 가지 버전의 해석은 모두 그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오리지널의 경우는 청취자로 하여금 매우 곡의 구성을 알기 쉽게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무난한 시작과 중반부의 갈등 표현, 그리고 다시 장조로 조바꿈되며 절정에 이른 후 템포가 빨라지며 축제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후반, 그리고 환상적으로 끝맺는 마무리. 이를 탄탄한 기본기의 연주로 비교적 기교 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화강암처럼 골계미가 있습니다. 혹은 수더분하고 순박한 시골 처녀의 이미지. (더 기어나가면 신의 물방울을 쓰겠군요. 오바는 그만. -_-;)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공산주의 예술(가극)의 향취가 느껴진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예술 또한 사상의 도구로 사용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작품이 갖는 주제의 내용은 관객에게 쉽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야겠지요. 마치 "평화로웠던 우리 민족에게 어느 날 고난이 닥쳐와 비극을 겪고, 다시 햇살이 비추어 즐거운 나날을 되찾고 갈등이 해소된다"는 내용의 교향시가 머릿속에서 금방 그려질 법합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 민중이 학살당하는 장면을 소를 도축하는 장면으로 이미지화했더니, 소련 관객들이 "뭐야 쟤네들 도망가다 말고 왜 갑자기 소를 잡아서 잔치하는 거냐?" 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긴 하지만.)

한편 뉴욕 필하모닉의 연주는 우아합니다. 소리의 표현이 매우 부드럽고, 다채로우며 풍성하다는 느낌을 첫머리부터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절대 서두르지 않는 귀부인의 우아한 걸음걸이처럼 곡을 표현해 나가며, 악보의 음표와 기호 하나하나에 담긴 메시지를 빠짐없이, 그러나 조화롭게 펼쳐냅니다. 마치 생동감있는 대규모의 극장 뮤지컬이나, 탁월한 미장센을 보여 주는 대작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두 나라의 곡 해석은 서로 다르며, 그 해석의 느낌이 각자가 가진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아 재미있습니다. 북한은 가극 같고, 미국은 영화 같습니다. (*특히 미국 헐리우드 영화라고 하면 흔히 사람들은 액션영화, 블록버스터만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만 - 개인적으로 헐리우드 영화의 특성이라 치면 철저히 기본기를 따르면서도 그 표현기법이 다양하다는 데 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 이후로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소련, 이탈리아, 독일, 일본, 우리나라 등 여러 나라의 영화가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지만, 현대 영화의 편집기법을 정립한 사람은 미국의 D.W.그리피스이듯.... 아직도 헐리우드 및 대부분의 영화는 실험적인 의도가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그리피스의 편집기법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고....)

클래식에 그렇게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같은 악곡이지만 다른 해석을 찾아 들으며 차이점을 즐기는 것도 음악을 더 즐겁게 듣는 방법이 아닐까 싶네요. 개인적으로 이 경우에는 우선 오리지널을 듣고 나서 뉴욕 필하모닉 버전을 듣는 것이 좋은것 같습니다만.. 그러한 해석차와는 별도로 어느 쪽을 먼저 듣더라도 그 순서에 상관없이 곡 자체는 참 감동적인 악곡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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