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담장 위에 앉아서, 물끄러미 먼 산을 바라보며 첨탑의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무엇인가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풍도 아니고 떨림도 아닌 그 무슨 숨결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나는 눈을 내리떴다. 발밑의 한길에는 연회색 드레스를 입고 장밋빛 양산을 어깨에 걸친 지나이다가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발을 멈추더니 밀짚모자 챙을 뒤로 젖히고 비로드처럼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서 뭘 하고 있어요? 그런 높은 담장 꼭대기에서?" 그녀는 몹시 야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당신은 늘 날 사랑한다고 맹세하는데, 정말로 날 사랑한다면 내가 있는 이 한길로 뛰어내려 봐요."

 지나이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떠밀기라도 한 듯 벌써 밑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담장 높이는 대략 4미터가 넘었다. 발이 먼저 땅에 떨어졌지만 그 충격이 너무 강해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쓰러져서 한순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지나이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의 귀여운 도련님." 내 위로 몸을 굽히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근심 어린 상냥함이 울렸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요... 어쩌자고 내 말을 곧이 듣나요.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일어나요."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 곁에서 숨 쉬고, 그녀의 두 손이 내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녀는 부드럽고 싱그러운 입술로 내 얼굴 전체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러나 이때 지나이다는 내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는데도 표정을 보고 내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자, 일어나요, 장난꾸러기. 얼빠진 사람. 어쩌자고 이런 먼지 속에 그냥 누워 있어요?"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 양산이나 집어 줘요." 지나이다가 말했다. "어머. 내가 이런 곳에 양산을 내동댕이쳤다니, 날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도대체 그게 무슨 어리석은 짓이에요? 다치진 않았나요? 아마 쐐기풀에 찔렸겠지요? 날 쳐다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대답도 안하네." 그녀는 마치 혼잣말처럼 덧붙여 말했다. "무슈 볼데마르, 집으로 가서 몸이나 깨끗이 씻어요. 감히 내 뒤를 따라올 생각은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 화낼 거에요. 그리고 다시는 절대로...."

 그녀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재빨리 저쪽으로 가버렸다. 나는 길에 쪼그리고 앉았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쐐기풀에 찔린 손이 따끔거리고, 등은 욱신욱신 쑤시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나 그때 경험한 행복감은 내 일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은 달콤한 아픔이 되어 내 온몸에 퍼졌고, 마침내 환희에 찬 도약과 외침으로 변했다. 정말로 나는 아직 어린애였던 것이다.

-<첫 사랑> 中, 이반 투르게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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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저렇게 아무런 갈등도 고민도 없이 누군가의 말에 곧바로 순종할 수 있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지금 그러라면 못 그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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