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종의 필요에 의해 쓴 부분 조금 잘라낸 글입니다.)


오래전, 임금이 직접 신하들에게 시험을 치르는 일이 있곤 했다. 문제를 내는 것은 임금이요, 답을 하는 것은 신하다. 임금이 마음 안에 담아두고 있는 근심거리를 문제로 내면, 신하들은 저 나름으로 풀어 이것저것 답을 낸다. 좋은 말도 있고, 때로 임금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답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특히 이것이 국정의 문제라면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도 있고 임금은 자신의 날개가 되어줄 훌륭한 신하를 뽑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좋은 일만은 있을 수 없으니 때로 부작용도 있다.
임금이 신하들을 향해 문제를 내다보니 가까워 질 수 밖에 없고- 그 거리의 가까움은 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으니.
바로 정제되지 못한, 날 것 그대로의 피드백이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고가게 된다는 점이다.

평소라면 신하들의 의견은 상소를 비롯한 문서로 올려지며, 이것을 비서실인 승지들이 맡아 1차 검증을 한다. 여기서 너무 아니다 싶은 의견은 군데군데 다듬어지기도 하며, 아예 임금에게 올려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대책은 다르다. 임금이 직접 문제를 내리고 신하가 올린 답을 직접 채점한다. 이렇게 하여 신하의 목소리가 직접 임금에게 와닿게 되니 때로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기도 했고 - 다른 한편으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기도 했다.

게다가, 딱히 답안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가까움 역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바로 영조 44년에 발생한 사건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영조는 고희를 절반 넘긴 74세로,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서 최장수는 물론, 당시 평균 수명으로도 대단한 장수를 누리고 있던 차 였다. 그 탓에 안타깝게도 알츠하이머 병의 가능성을 가장 집중적으로 뒤집어 쓰고 있기도 하다. 허나 딱히 병이 있건 없건 나이든 사람이 사소한 일 깜빡깜빡하거나 했던 말 또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의 이치이기는 하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영조의 오락가락하는 정신보다도 나날이 더러워지고 쪼잔해져가는 성질머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내 코 앞에서 기침한 놈 누구냐, 당장 텨 나와라."
 
그 해 겨울인 11월 20일, 영조는 대단히 불편한 심기를 담은 하교를 내렸다. 집경당(集慶堂)에다가 신하들 옹기종기 모아놓고 친히 책문을 치른 직후의 일이었다. 임금이 직접 신하들의 시험을 보는 일이니 얼마나 기합이 들어간 자리였겠는가. 헌데 문제를 내건 뒤 누군가가 - 무엄하게도 임금의 앞에서 기침을 해버린 것이다. 사실 기침이야 일부러 했다기 보다는 실수로 그럴 수도 있는 생리현상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영조는 이 일로 단단히 화가 났다. 어떻게 감히 임금 앞에서 기침을 할 수 있느냐! 고.
흔히들 나이가 들면 둥글둥글해진다고 하지만, 사실 먹는 연수와 비례해서 고집도 강철로 된 무지개가 되어가는 법. 나라의 임금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의 고집이란 분명 굳세거니와, 역대 왕들을 따져봐도 영조는 결코 순한 성격에 속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옹고집 임금이 뿔이 났는데, 어느 신하가 감히 나서서 "전데요"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서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만 보는- 그리고 기침을 했던 주범 누군가는 팥알만해진 가슴을 끌어안고 바닥의 장판지 무늬만 확인하고 있었으리라.
범인(?)이 나서지 않자, 영조는 2차 하교를 내렸다.
 
"자수해라. 아님 내가 낸 문제 뜻도 모르는 거니까 다 물러가라."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정확하게 실려있지는 않지만, 영조의 말에 따르면 군군 신신(君君臣臣)이라는 글귀가 들어가 있는 듯 하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즉 영조의 뜻대로 풀이하자면 신하는 신하답게 임금의 앞에서 기침을 하지 말아야 하고, 했을 경우에는 냉큼 자백을 해야 한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신하는 신하답게 임금을 존경하고 보필해야 한다는 말이리라. 물론, 여기에서 영조는 '임금답게' 신하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야 한다는 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긴 했지만.

왜 이리 걍팍하나 싶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일흔 살 넘은 할아버지다.
이렇게 서슬퍼런 임금의 협박에도, 자수자는 광명을 찾으러 들지 않았다. 따라서 영조는 단단히 삐져버렸다. 그래서 이 '기침' 관련으로 무려 3번이나 연속 하교를 내렸는데 자수 안 하면 그 자리에서 시험본 모두를 채용 안 하겠다는 협박에서부터, 송나라 태조의 예까지 들어가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왜 송나라 태조냐면, 워낙 마음씨 좋기로 이름난 송나라 태조도 군법의 적용에만은 엄격했기 때문이었다... 영조로서는 자기는 송 태조처럼 착한 왕이지만(사도세자가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자수 안 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북위의 적흑자와 고윤의 일화까지 들었는데... 적흑자는 뇌물받은 걸 숨겼다가 목이 날아갔고, 고윤은 역사서를 작성하며 솔직히 적었던 일을 자백했다가 용서받은 인물이었다. 즉, 순순히 자수하면 꼭 처벌은 안 할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긴 것이기도 하다. (따지고보면 애초에 적흑자 쪽이 질이 나쁜 편이었으니 딱히 솔직하지 않아서 처벌받았다고 하긴 뭐하다.)
아무튼, 일련의 하교들에서 영조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야?"

- 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영조의 마지막 하교는 어쩐지 좀 측은하기까지도 하다.
 
"내가 보는 건 좀 어두워도 귀는 이전처럼 잘 들린다."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침소리 하는 것을 잘 들었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하며 살기등등하게 기침을 한 범인의 자수를 권했다.
뒷이야기를 하자면 끝내 기침의 진범은 밝혀져지 않았다. 글쎄, 왕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누군가 기침을 하긴 했으리라. 하지만 자수하는 사람도 없었고 고발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실 이 정도로 사단이 나기에는 너무 하찮은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뒤끝 넘치는 영조는 툭하면 "그 때 기침 누가 한거야?" 하며 으르렁댔고, 그 다음날 신하들에게 소학을 강의하면서 결석자는 영남 해변에 귀양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무려 만언에 달하는 전교를 내렸는데, 어김없이 기침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젊은 것들 못 쓰겠다! 라는 말을 토로했으니.
하지만 이런 명령이 무섭거나 공포스럽기 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게 어째서이려나. 늙어서 서운하고 신하들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아 속상하고, 어느 덧 11월이 되어 한 살 더 먹어가는 게 슬픈 임금의 땡깡이려니. 그래도 영조는 애써 외친 것이다. 난 아직 귀는 멀쩡하다고!

 

p.s :

안 풀리는 글을 부여잡고, 그러면서 새 글을 위한 재료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며 둥기둥기 시간 보내고 있습니다.

졸렵지만 잠을 자고 싶지는 않고, 그냥 외롭고 쓸쓸하네요.
이럴 때는 억지로라도 재미난 이야기를 푸는 것이 이야기꾼의 본업.

키우던 늙은 고양이가 며칠 심하게 앓았는데, 무사히 위기를 넘긴 듯 합니다.
길에서 죽어가던 어린 것을 주워온 게 그 옛날인데, 저는 어른이 되고 녀석은 늙었군요.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려웠던 순간을 상상하니 많이 힘들더군요.

 

인간이고 세상이고 사물이고 시간이 흐르면 변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이 서글픕니다.

담배도 술도 못하는 체질입니다만, 이럴 때 진실로 술 한잔 마시고 싶네요.

달을 안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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