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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문제를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1.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통용해서 쓴다 하더라도 대개의 경우 별 무리가 없다.
2. 통용해서 쓴다 하더라도 별 무리가 없다는 말이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쓰자는 주장을 강력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가 어느 정도 있다면 안 바꾼들 또 무슨 상관인가?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내버려둬라.
3.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특정세력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내가 힘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 같은 사람 하나가 어떻게 생각한들 별 상관은 없는 문제이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 듯 하다.


1. 자유민주주의의 성립: 보통선거권 투쟁

자유민주주의는 그 이름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성분을 주축으로 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종합(synthesis)이다. 그러나 화합물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두 가지 성분에서 만들어진 종합은 각 성분의 비율이나 결합구조에 따라 다양한 결과물이 생성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식별되는 '하나의' 종합, 즉 특정한 종합을 지칭한다.

그럼 '자유민주주의'라고 불리는 특정한 형태의 실체는 무엇인가?

우선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내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구성방법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핵심 쟁점은 보통선거권 문제였다. 

아니 감히 자유주의자들은 보통선거권을 부정했단 말인가? 농담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다. 존 스튜어트 밀 조차도 완전한 보통선거권에 반대했다. 『대의정부론』에서 그는 빈민이나 문맹자에게는 선거권을 제한하거나 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이 언제 쓰여졌는가? 19세기 중반(1861년)이다.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선거의 4대원칙으로 학교에서 달달 외웠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 모르지만, 이 원칙들은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원칙이 아니라 쟁점이었다.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1850년부터 1918년까지 프러시아에서 실시되었던 선거제도에 있어서 유권자들은 재산에 따라 세 계층으로 분류되어 각 계층은 보통선거에 의해서 국회의원의 1/3씩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가장 소규모 집단인 최고 부유층은 총유권자 중 약 5%, 중간계층은 약 13%, 그리고 가장 대규모 계층인 극빈자 계층은 약 82%에 달했다. 따라서18%의 유권자들이 국회의원 의석 중 67%를 선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Dahl, Robert A. Dilemmas of Pluralist Democracy: Autonomy vs. Control. Yale University Press, 1983. (이만희 역, 『다원민주주의의 딜레마 : 자율과 통제』. 부천: 인간사랑, 1990. p.192)

이런 선거제도는 전형적인 불평등선거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후진국(?)이라 할 수 있는 프로이센의 사례라 다소 마음에 걸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의회민주주의를 가장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원조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사례는 어떨까?

영국에서 비밀투표함이 도입된 것은 1872년(Ballot Act 1872)이었다. 이 점만 보아도 영국이 선거권 문제에 자유로운 국가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유권자 수를 살펴보면 더 심각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178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유권자 수는 총인구의 3%에도 미치지 못하는 21만 4천명이었다. 스코틀랜드는 한술 더 떠 1832년 260만 명의 인구 중 유권자는 고작 4,5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1832년 개혁법이 적용되기 전 영국의 유권자 총수는 40만 명을 약간 넘는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개혁의 결과로 유권자 수는 두 배가 좀 못되게 늘어났지만 늘어난 선거권은 주로 도시의 신흥 중산층에게 돌아갔다. 이런 식의 변화, 즉 영국에서 전체 성인인구 중 유권자의 비중의 변화를 대략적으로 도시한 것이 다음 그림이다.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처럼,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일련의 개혁입법을 통해 유권자 기반이 넓어지기는 했지만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보통선거권은 확립되지 못했다. 남성의 보통선거권은 1차대전을 계기로 이루어졌으며, 여성의 보통선거권은 그보다도 더 늦게 이루어졌다.

이랬기 때문에 19세기에는 (당시의 제한선거권을 기반으로) 대의제를 장악하고 있던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손을 잡고 공격하는 형세가 표출되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약간의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동시에 역사무대에 출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주의가 지배세력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아가면서 양자 공히 그것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주의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둘의 견해는 달랐다. 사회주의는 자유주의가 설정한 재산제한선거제가 인간의 자연적 평등성에 위배된다고 비판하면서도 단순히 정치적 평등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평등을 지향하여 시민사회의 극복,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폐지를 모색하였던 반면에, 민주주의는 정치적 권리의 토대가 되는 소유권 자체는 문제 삼지 않은 채 제한선거제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면서 성년남자의 보통선거제를 주창하였다. 이 점에서 19세기의 민주주의를 소생산자층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한 것으로 보는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적어도 자유주의가 19세기 말에 보통선거제를 받아들여 자유민주주의로 탈바꿈하기 전까지, 즉 제한선거제가 온존하는 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기존질서를 공격하는 데 상당 정도로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예컨대 영국에서 사회주의자 오웬과 인민헌장운동가들(the Chartists)은 선거권의 납세점이 매우 높았던 시기에 선거법의 개정을 위해 공동투쟁하였으며, 프랑스에서 7월 왕조기에 사회주의 진영은 종종 공화주의 운동의 핵심적인 일부분이었다. 적어도 이 시기에 영국과 프랑스와 같이 절대왕권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이 완결된 나라에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더욱이 혁명적 전통이 강하고 공화정이 여전히 인간해방의 일정한 역사적 조건이던 프랑스의 제3 공화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프랑스혁명의 완성으로 여길 수 있었다.

최갑수. “사회주의”. 『서양의 지적 운동 (1)』. Ed. 김영한 & 임지현. 서울: 지식산업사, 1994. pp.151-152


19세기 전반의 시점에서 보면 의회를 중심으로 한 대의민주정 체제는 확실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적어도 부르주아 정도의 재산이 없는 사람은 아예 투표권을 가질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한 세기가 넘는 갈등 끝에 자유주의 세력의 저항을 물리치고 보통선거권을 중심으로 한 참정권 쟁취 투쟁이 성공으로 일단락되자, 기존의 도전자 진영 내부에 잠복해있던 갈등이 드러나게 된다. 즉 완전한 참정권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대의제, 즉 자유민주주의에 어느 정도 만족한 진영과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진영으로 말이다. 후자는 주로 사회주의자들로 이들은 완전한 참정권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경제적 평등이 달성되지 못하는 이상 자유민주주의는 여전히 허울 뿐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일단 여기까지 하고 지금까지의 논의로 분명해진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특징을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자유민주주의는 (흔히 말하는 선거의 4대 원칙 같은) 완전한 참정권을 기반으로 한 대의민주정을 의미한다. 뒤집어 말하면 자유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배제하는 개념이다. 생각컨데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바꿔 씀으로서 중요한 의미상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국민국가 같은 규모가 큰 공동체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체제로서 직접민주정은 고려의 대상이 못된다는 데 폭넓은 합의가 있다. 따라서 나는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이 문제가 이 둘이 통용되지 못할 이유는 못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민주주의란 말에서 직접민주주의를 연상하는 사람들의 혼란을 막아주기 위해 보다 명료하고 좁은 표현으로 바꾸자는 것이라면 일리있는 의견이라 하겠다.


자 이제 다루다 말았던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인용했었던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이다.

사실상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러한 결합이 적어도 이론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그 두 운동이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해서 계획경제에 입각하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것도 아니며, 자유를 전제하는 민주주의가 가끔 강제를 전제하는 사회주의와 대립관계에 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의 유럽에서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자임하였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법 앞의 평등, 곧 시민적 평등을 설정했다면, 사회주의는 인간 삶의 여러 조건 속에서 평등을 완성할 것이었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자유의 지배를 확립했다면, 사회주의는 단지 시민의 자유만이 아니라 생산자의 자유도 확립할 것이었다.

이러한 시민-생산자의 이중적 존재성은 사실상 보통선거제와 의회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비판을 함축한다. 어쩌면 그것은 계급정치를 표방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딜레마였다. 선거권자들이 생산과정에서 점하는 위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로부터 더 많은 표를 얻으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계급정치를 저버리는 처사가 될 것이며, 그렇다고 계급정치를 지키자니 선거에서 다수표를 획득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딜레마는 ‘선거사회주의’를 내걸었던 서구의 ‘사민주의’에서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지만. 이미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여러 사회주의이론가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었다. 프루동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생산이라는 경제적 영역에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한정시킴으로써 선거와 대의제, 더 나아가 국가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했고, 다른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의회를 단지 선전의 도구이자 무대로 간주하였다. 마르크스에게 대의제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계급지배의 근대판에 불과했으며, 파리코뮌은 대의제가 부르주아권력을 호도하는 소품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최갑수,1994]

이처럼 (다양한 계열의) 사회주의와 현실사회의 대의제와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관계는 아니며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불편한 관계인 적이 더 많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확신은 그가 제한선거권이 한창이던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강화된 측면도 있겠으나,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를 보았던들 그가 만족스럽다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사회주의 진영의 다양한 입장들 중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존이 가능한 입장은 제한된다. 그 최소한의 기준은 기존의 '완전한 참정권에 기초한 대의정' 내부의 일개 정파로서 정파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대의정의 규칙을 지키며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자는 입장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준수하는 정당의 예로는 독일의 사회민주당(SPD)를 들 수 있다. 이 정당은 유럽 사회주의의 역사와 거의 맥을 같이 할 정도로 유서 깊은 정당인데, 오늘날 독일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며 독일 유권자들은 우파의 기독민주당(CDU)에서 좌파의 사회민주당으로, 다시 기독민주당으로 정권이 옮겨져도 자유민주주의가 유지된다는 것에 충분한 확신을 갖고 정파를 고를 수 있다.


2. 우리나라와 자유민주주의

우리는 유럽 국가들과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19세기 내내 우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싸운 저런 문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연하지, 조선시대였으니까. 20세기 전반에도 저 문제를 다룰 수 없었다. 주권 잃은 식민지였으니까. 우리는 이 모든 일이 다 정리된 후에,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해외에서 완성된 자유민주주의라는 종합을 1948년에 한 번 수입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자유민주주의 이전의 전사(前史)가 없다. 사상사적 차원에서 원류를 찾는다면 서구를 바라볼 수밖에 없으나 그것은 유럽의 역사이지 우리의 역사는 아니다.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란 서구에서이 제도를 만들어낸 사회적 기반과 역사적 경험과 아무 관계없이 덜컥 던져진 완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유민주주의가 처음부터 잘 돌아갔다는 말은 아니다. 이후 수십 년의 역사는 이 제도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에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좌절에 대한 우리 고유의 경험이다.

그런데 지난 60년 동안 이식된 자유민주주의를 대한민국이란 환경에서 키워나간 결과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발전했는가? 아니다. 그것은 그냥 자유민주주의이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한 나라에 불과하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우리에겐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민주주의는 없다고 말해도 무방하며 둘은 충분히 통용해 쓸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3. democracy는 민주‘주의’인가?

그다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자유민주주의'의 관계를 보자. 박명림 교수의 설명(<한겨레> 8월 24일 보도)에서 잘 밝혀져 있듯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유신헌법 때 등장하는 것으로 그 전에는 제헌헌법 이래 '민주주의의 제(諸) 제도'라 하였다. 1949년 독일기본법에는 '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자유로운 민주적 기본질서)'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제처의 영어 번역은 'the liberal-democratic basic order'가 아니고 'the free and democratic basic order'로 되어 있단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라 할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의 유래(由來) 문제를 떠나서도 과오가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민주주의 질서, 민주정치 게임의 규칙을 말하는 것이지 그 질서 안에서 실현되는 정책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KBS1 <심야토론>에서 강창일 의원도 잠깐 그런 뜻의 발언을 했다) 민주주의란 정치제도의 그릇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 거기에 담길 내용물을 정한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건너뛰는 과오이다. 법적·제도적인 것과 정치적·사상적인 것은 궁극에는 합류하는 것이지만, 전자는 법적·제도적인 것이고, 후자는 정치적·사상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남재희,2011]

독일어 번역 과정의 의미 변질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정말 남재희의 말대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건너뛰는 과오"일까? 남재희는 독일어 이전에 민주주의란 번역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democracy를 번역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원래 그리스어의 대중/다수라는 의미의 데모스(demos)와 권력/지배/통치라는 의미의 크라토스(kratos)를 합쳐 만들어진 것으로 '다수에 의한 통치'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이 단어와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도 한번 살펴보자. monarchy(군주정), aristocracy(귀족정/귀족제), oligarchy(과두정/과두제), theocracy(신정), 즉 군주정은 군주에 의한 통치, 귀족정이나 과두정은 소수의 귀족이나 실력자에 의한 통치, theocracy는 신탁에 의한 통치…….

이렇게 보면 이 번역은 다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cracy는 ~주의(主義)라기보다는 ~정체(政體)라고 번역하는 것이 어울린다. ~주의로 흔히 번역되는 ~ism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democracy는 기본적으로 민주정(民主政), 민주정체(民主政體)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기본적이라고 한 것은 부차적인 의미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정치/통치제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얼마간의 이론적 기반이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군주정을 뒷받침하는 정치이론으로는 왕권신수설(divine-right theory of kingship)이라는 것이 있다. 민주정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계몽사상으로부터 유래하는 그와 비슷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민주권론(popular sovereignty) 같은 것들이다. 민주정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이런 일련의 사상이나 정치이론은 민주정치이론(theories of democracy) 정도로 불린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약점이 있는) 번역어를 늘 쓰고 있는 관계로 democracy를 정치제도가 아니라 이념처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위 글의 필자 남재희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법적 제도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democracy는 기본적으로 민주정(民主政)이고 바로 법적 제도적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법적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사상적인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그는 이 번역어의 함정에 빠져 있음을 잘 보여준다.

지금부터라도 오류를 줄이기 위해 민주정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늘려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안타깝게도 민주주의라는 번역용어는 너무 널리 보급되어 있어서 일조일석에 뒤집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도 그것이 상당부분은 민주이념이 아니라 민주정치체제를 뜻하는 것임을 늘 염두에 두고 사용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라고 외치며 민주화 시위를 했던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우리나라에 민주정치체제를 획득하기 위해 시위를 한 것이지 민주정치사상에 대한 사상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4.. 끝으로: 자유민주주의란 말을 빼앗기지 말라

이상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현 정치체제의 근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 정치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려는 야망을 품은 혁명적 세력의 일원이 아닌 한) 어떤 정치세력을 지지하든 상대 진영이 적극적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이 말을 쓰지 않기로 하는 것은 이 귀중한 단어의 소유권을 빼앗기는 것이며 보물을 들어다 정적에게 바치는 것과도 같다. 이 말을 한번 특정 정치세력에게 전유당하고 나면 어떤 토론을 할 때도 수사학적으로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A: 당신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가?
B: @@#$%#@$^%&
A: 흥. 그럴 줄 알았어.

정치적으로 현명하다면 우리 또한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은 해석을 실어 그 말을 적극적으로 쓰고 해석함으로서 특정 정치세력이 그 단어를 자기들만의 독특한 해석에 가두지 못하도록 저지해야 마땅하다.

A: 당신은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가?
B: 웃기는 소리. 나보다 더 자유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람도 또 없을 것이다.
C: 모두가 자유민주주의자라니, 이건 별 쟁점이 못되겠구만. 딴 이야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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