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을 다녀왔어요. 이박 삼일 여정 중 가장 힘든 건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

피곤해 무너지는 몸과 마음을 붙들고, 아무도 안 기다리는데 왜 서울에 돌아와야 해, 서울 구려! 하면서

신경질을 있는 대로 내다가도, 열쇠로 문을 여는 순간 (일 주일째 꽂아둔) 꽃향기가 확. 고양이가 품으로 확.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집에 꽃을 꽂고 고양이를 길러야 합니다.

 

부산과 포항에 자주 가요.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서울서 생기는 괴로운 일들이

몸 속에 쌓이고 쌓이다가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기차를 탑니다.

내려가는 동안 (서울을 저주하면서) 저와 반갑게 놀아 줄 친구들을 소집하지요.

그래서 저는 서울 살면서도 제 부산 친구들보다

해운대에 자주 가는 사람이 됐습니다 -_-

자주 가느니만큼 이제 가서 구경하고 싶은 건 없고 누가 절 환영해 주는 게 기뻐요.

저는 아직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망가고 싶다! 환영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맛있는 거 먹고!

설거지 안 하고 싶다! 는 유아적인 욕망을 만방에 떨치는 것 같아 부끄럽지요.

 

부산에서 좋아하는 것중 하나는 갈매기입니다. 남해의 갈매기는 희고 깨끗하고

깜찍한 구석이 있습니다 게다가 모두 한쪽 방향을 보곤 하는 것 같아요.

잘 모르지만 동해의 갈매기들은 사납게 생겼어요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파먹을

것 같은 기세로 날아다니던데요. 서해의 갈매기들에겐 거지갈매기라는

별명이 있지요. 그에 비하면 남해의 갈매기는 귀여운 얼굴로 바다를 보고 있다가

누군가 새우깡 봉지를 뜯으면 움파룸파족처럼 한꺼번에 돌아보며 날아오릅니다.

 

젊을 때는(?) 숙소가 다 무엇인가 밤새 술 마시고 대충 눈 붙이자

찜질방과 dvd방, 여름철엔 노숙도 괜찮다는 자세로 살아왔는데

이젠 올드 앤 와이즈 해져서 첫날에는 숙소 체크인부터 했고

둘째날엔 친구의 자취집에서 열두 시간 잤습니당...

토요코인에 처음 묵어봤는데 혼자 여행하는 사람에게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객실이 조금 춥긴 했지만 깔끔했고, 흡연실을 원했는데 해당실이 없다며

싱글 룸 가격에 더블 룸을 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실 빈 침대 하나를

옆에 두고 누워 자는 게 뭐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지만 더 비싼 방이니까요...  

밤에는 입고 있던 셔츠를 손빨래해서 건조기에도 돌리고 조식도 챙겨먹고...

좋은 사람 된 느낌.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소고기국밥을 먹고, (왠지 한 번 가보고 싶었던)

해운대 아이리시 펍에 가서 피시앤칩스 따위와 흑맥주를 먹고...

바닷가니까! 복찜과 복지리를 먹고! 부산에 왔으면 시원소주를 마셔야 하는데

복어에 집중하느라 술을 마실 힘이 없더군요.

이동하는 동안 "옵스"에 가서 빵을 사고!

이자까야 "붉은 수염"에 도착해선 문어 카르파쵸 따위를 먹을 배가 남아있지 않아서

시샤모를 먹은 것이 천추의 한이지만 기분 탓인지 시샤모도 부산 것이 맛있는 것 같아요.

 

사직동에 있다는 맛있는 팥빙수를 꼭 먹고 싶었는데

친구들이 춥다며 무슨 팥빙수냐며-_- 다들 싫어해서  

롯데가 승승장구해서 가을야구를 하게 되면

야구를 보러 내려오기로, 그때 먹기로 했습니다

롯데가 잘해줘야 할텐데요.

 

다음 날에는 점심으로 남천동 할매떡볶이; 를 먹고

한번쯤 구경하고 싶었던 인디고 서원도 구경해보고

옵스에 또 가서 빵을 또 사고...

 

포항에 갔더니 포항 친구는 제가 먹고 온 것들 리스트를 듣더니

"부산에 와서 회 한 점 안 먹고 왔단 말야?" 하면서

 죽도시장으로 안내합니다. 태어나서 회를 이렇게 많이 먹은 건

 처음인 거 같아요. 만오천원치 떠서 초장집에 앉았더니

 친구의 단골집이라며 굉장히 많은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청하가 술술...

 친구가 쌈장에 참기름이며 다진마늘을 넣어서 막장도 직접 만들어 줬어요.

 나중에는 몸 속에 회가 꽉 차서 사지의 박음질이 튿어질 것 같은 느낌.

 과메기를 눈앞에 두고도 못 먹고 왔어요.

 

 그 다음엔 시내로 가서 안주 하나를 시키면 서비스로 하나를 더 주는

 막걸리집에 가서 꿀막걸리를 마셨지요...

 조개전골도 먹어야 하는데! 물곰탕도 먹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패퇴. 포항에서 경주는 가까우니까

 다음날 일찍 같이 경주에 가서 맛있는 한정식을 먹자고 약조하며

 친구 집으로 들어왔지만 친구가 상을 차리는 동안 의식을 잃고 잠 속으로...

 다음날 아침 친구가 차려준 아침밥상을 먹고 반주로 (부산에서 사온) 모주와 와인을

 마시다가 다시 잠 속으로... 경주는 못 갔군요.

 

 점심으로는 뭔가 굉장히 맛있는 만두집에서 굉장히 맛있는 만두를 먹었습니다.

 60개 세트를 사서 포장해 올까 잠깐 고민했지만 배낭에는 이미 간식 및 선물용 옵스 빵이

 잔뜩 들어있는 고로 아쉽게 포기하며 저녁 나절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박삼일간 받은 융숭한 대접을 떠올리니

 무척 쓸쓸했지요 나는 왜 여행지에서 살 수 없는 걸까요 이제 제 손으로 밥 차리고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삶으로, 아무도 딱히 반가워하지 않는 삶으로,

 게다가 월요일에 출근까지 해야 하는 삶으로 -_- 돌아오기 싫었지만

 손님과 생선은 사흘이 지나면 냄새가 납니다 그러니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적절한 때 돌아오는 게 좋아요.

 

 맛있는 걸 잔뜩 먹고, 빈 시간에는 가져간 책을 읽고,

 친구들에게 엽서를 써서 부쳤습니다 부산 우체국 소인이 쾅 찍혀 도착하겠죠

 받는 사람들도 잠깐은 즐거울 거예요.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왠지 서울로 돌아가서 할 일들에 대한 꼼꼼한 다짐들.

 방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거나 밤에는 보습 크림을 꼭 바르고 자야지

 사람들 앞에서 울지 말아야지 좋아하는 사람이 화나게 하면 몇 번을 참을까

 형편없이 실패해서 죽을 것 같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애매한 것들을 정하는 일에 겨울 바다는 아주 좋은 배경이 되었습니다.

 방구석에서 전기장판과 고양이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생각하면 루저 같지만

 부서지는 파도! 발 밑에서 반짝이는 모래! 갈매기의 꿈!

 속에서 생각하면 건실한 기분이 들잖아요 게다가 모두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포항에서 회를 먹여준 친구를 위해

 "열혈남아" dvd를 가져갔어요.

 동봉한 카드에는 '...너는 분명히 기뻐할 거야' 라고 쓰고.

 포장을 뜯자마자 정말 너무 기뻐하는 걸 보고 같이 기뻐했어요.

 -- 어떻게 "열혈남아" 생각을 했어?  "동사서독" 도 아니고?

 그런 순간이 좋아요. 상대가 무엇에 기뻐할지 미리 알게 되는 드문 순간들과

 드문 관계들.

 그런 걸 더욱 잘 만들기 위해서, 서울에서도 열심히 살아야겠어요.

 롯데도... 이대호가 없어도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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