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싸우고 있습니까

2012.02.14 23:43

lonegunman 조회 수:1693




한창 엑스파일 보느라 바쁠 나이였어서, ER을 챙겨본 건 아닙니다

고작 시즌1,2 정도를 띄엄띄엄 봤을까요

그 와중에도 굉장히 좋아하는 캐릭터가 있었는데 배우 이름도 모르는 '닥터 그린'이었습니다

굳이 찾아볼 정도는 아니라 지금도 정확히 찾아보진 않고 쓰는 글이지만, 그래도 살짝 머리가 까진 그 얼굴 모습은 기억이 나요

한 에피소드에서 후배 의사 A가 선의의 실수를 합니다, 그 실수로 아마도 A의 처지는 벼랑 끝에 몰리게 될 겁니다

모두가 그의 실수를 보듬어주는 방향에서 피해자 측과 원만한 합의 및 보상을 하려 동분서주하죠

그러다 원래 주위와 동화되지 못하던 천재 의사가 피해자측에 동료의 실수를 찔러버립니다

봉합되려던 상황은 악화되고 아마도 많은 소동이 있었을 겁니다

ER에서 제대로 기억하는 에피소드는 전혀 없는데 묘하게도 닥터 그린과 그의 이 대사만큼은 정확히 기억납니다

천재 의사가 피해자측에 동료의 실수를 발설한 건 엄밀히 말하자면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의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닥터 그린이 이 한 마디를 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건 쉬워, 그게 자신의 이득과 상관 없을 때는'

와, 방금 쓰면서 또 소름 돋았어

저에겐 알량한 정의감이 발동될 때 들여다보는 거울같은 한 마디입니다



오랜 온라인 생활로 터득한 한 가지는, 분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단순한 진리죠

하지만 분쟁은 늘 있고, 모두가 모든 분쟁을 피해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마다 어떤 분쟁은 피하고, 어떤 분쟁은 구경하고, 어떤 분쟁엔 끝내 한 마디 던지고 마는 건

타이밍도 타이밍이지만, 아마도 정의감이 발동되는 포인트가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저의 경우엔 분쟁이 맥락을 벗어난 조롱으로 둔갑할 때가 그것인 것 같습니다

'너의 이런 말은 이러이러하다'가 '이런 말을 하다니 너는 이러이러한 인간인가보다'로 변하거나

상대방의 현실 사진이나 그밖의 현실 정보들을 끌어다가 비웃거나

한창 논쟁이 오가는 중에 한 쪽이 'why so serious?'를 내뱉는 순간같은 걸 목도하면 욱,해요

남의 분쟁에 쉽게 정의감을 발동시키지 말자고, 닥터 그린의 말을 되새김질하다가도 못내 한 마디를 거들고야 마는 겁니다

꼭 남의 분쟁이 아니더라도, 저 또한 예전 구듀게에서 맥락없는 조롱을 받아본 적도 있었고, 다른 곳에서 선정적인 욕설을 들어본 적도 있었고, 또 어디선 뜨거운 논쟁을 나눈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제 욱포인트, 정의감 발동 포인트가 그래서인지, 다른 것보다는 역시 맥락없는 조롱을 받을 때 어디선가 나타나서 옳지 않다고 거들어주는 말들이 가장 힘이 되었어요



일전에 한 유저분이 링크해주신 글에 '인터넷에서 그렇게 열을 내다니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별 볼 일 없었으면'하는 부분을 읽었었습니다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시위는 할 일 없는 백수들이 기웃거리는 것'이라고 일축하던 한 정치인의 말도 오버랩되고

분쟁에 한하자면(꼭 그래야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가장 싫어하는 댓글 종류 중 하나여서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이 아니니까 잘못 된 거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이라서 폭력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현실 세계 부적응자들이 인터넷에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게 (사실이라 가정해도) 현실 세계 적응자들에게 조롱받을 일이 될 수 있는가?

현실의 논쟁과 현실의 관계가 넷상의 그것보다 선험적인 우위에 있는가? 그래서 전자가 후자를 깔보는 것이 당연시될만큼?

넷상의 세계와 관계와 발언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들을 조롱하는 저러한 태도가 오히려

넷상의 악플과 분쟁과 범죄를 촉발하는 시발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현실도 아닌데 넷상에서 '별 볼 일' 있을 필요 없다는 태도

모니터 속 활자와 숫자 너머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너무나 닳도록, 당연하다는 듯 하지만

정작 인터넷에선 원래 그러고 노는 거라는, 가상 공간인데 뭘 바라냐는 말을 쿨한 듯 내뱉을 땐 또 그 당연한 전제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는 것 같아요

이 활자와 숫자 너머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것






모든 아프리카인들은 통계치에 불과해요

한 두 명쯤 죽는 건 아무 상관도 없죠

내가 그동안 난민 구조에 얼마나 힘써왔는데요

언론도 아마 내 편일 걸요


몇 명쯤 죽이면 학살자 소릴 듣게 되나요?

인종 청소 genocide 하겠단 소리는 아니에요

집회에서 그 단어는 나쁜말이라고 했거든요

좋은 얘기라 서명도 했어요, 뭐라고 써있는지는 안 읽었지만


아프리카인들이란 그저 통계치일 뿐이죠

그러니까 좀 죽어도 괜찮아요

어이쿠, 또 한 놈이 죽어 진창에 던져졌네

아이고, 어쩜 좋아


그럼 이제 우린 빨래하러 갈까요

케이크 구우러 갈까요

볕도 좋은데 마실이나 나가 볼까요






인터넷은 가상의 공간이라 '원래' 허리띠 풀고 가볍게 노는 곳이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피씨 통신이 처음 통용됐을 때를 기억해보세요 

물리적 한계로 서로에게 닿지 못했던 비슷한 취향, 비슷한 생각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현실 세계에선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았던 말들을 더듬더듬 발설하기 시작하던 순간을.

넷상의 공간은 '원래'는 그런 곳이었죠. 때론 지나칠만큼, 돌아보면 오글거릴만큼 진지하고, 진실하고, 진심어린.

실제보다 더 실재적인, 현실의 누군가가 날 찾을 가능성을 희생하면서 접속하는 공간이었어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피씨 통신에 접속하는 동안 현실의 전화를 먹통으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그러니 현실 세계에서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는 말들이 있는 사람들에게 좀 더 기능적인 공간인 건 맞을 겁니다

못 생겼거나, 뚱뚱하거나, 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성적 지향이 다르거나, 경제적으로 열등하거나, 등등

그러한 '다름'을 조롱꾼들의 언어로 '현실에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는 거겠죠

그래서 '현실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나 넷을 진지하게 대한다'는 말은, 그 '현실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 세계에서의 폭력을 넷상으로까지 끌어오는 발언이란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 진지하고 그래? 너 걔네들 중 하나야? 아니면 왜 넷에 집착해? 현실에서 뭐가 아쉬워서?

진지한 논쟁, 진지한 고민, 진지한 관계들 사이에 이런 함의를 가진 조롱이 던져지는 순간-

'현실에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주홍 글씨가 두려워 오히려 최소한의 예의나 진지한 분위기가 산산조각나버리는 걸 많이 봤죠

난 아니야, 난 안 진지해, 난 놀고 있는 거야, 난 여기서 허리띠 풀고 놀아도 현실에선 아쉬울 거 없어, 끝까지 진지한 쟤가 범인이야, 쟤가 별 볼 일 없는 그 놈이야





어서 신발을 신어

오늘밤은 외출이야

대량 학살 대회를 구경 가야지


그래, 머리를 올리고 립스틱을 바르고

맨 앞줄에 앉으려면 서둘러야 해

넌 남미에 걸었구나, 난 요르단에 걸게

누가 이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늘밤이 지나면 우린 한밑천 잡게 될 거야

너도 우리랑 같이 가지 않을래?

오늘밤이 지나면 백만 장자가 돼있을지도 몰라

어서 빨리 우리랑 구경 가자


어서 신발 신고 나갈 준비를 해

오늘밤 대량 학살이 있을 예정이니까

좋은 신발로 골라 신고 외출하자

대량 학살을 구경하러 가는 거야





무슨 뚜렷한 논쟁에 참여하는 것도 아닌 이 실체없는 글을 길게 늘어놓고 있는 건 

아마도 제가 그 '못 생겼거나, 뚱뚱하거나, 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성적 지향이 다르거나, 경제적으로 열등하거나, 등등'의, 조롱꾼들의 언어로 '현실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 중 하나여서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해요

피씨 통신 시절부터 가상의 네트가 우릴 매혹했던 건 누구에게나 하나씩 있는- 그 '실체없는 평균'에서 비껴간 '다름'을 토로하거나 혹은 감출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전 그 기능이, 그 기능이 낳는 진지함이, 조롱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태도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피씨 통신을 넘어 인터넷 세대가 개막하고, 그것이 상용화되어 좀 더 그 '실체없는 평균'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일상적인 도구가 되면서

그 평균에 가까운 -사지멀쩡하거나, 외모준수하거나, 평균적으로 소위 사람 구실하는- 자들이 현실에서 갖고 있는 우위를 넷상에 끌고 오려는 발버둥으로 보이거든요

여긴 어차피 가짜라고, 조롱하는 나보다 진지한 네가 바보라고

현실의 좁은 풀 안에선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얘기를 여기서도 할 수 없고, 하지 않게 만들려는, 그 진지함을 파괴하려는.

현실에서 가진 물질적, 사회적, 신체적 우위가 통하지 않는 곳에 대한 분탕질 말입니다

'인터넷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역사 왜곡까지 하면서 말이죠



그냥 노는 거라는 쿨함, 온라인은 원래 그렇다는 협잡, 너만 그렇지 않다는 조롱에 넘어가지 맙시다

그들이 그런 곳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 원래 그런 건 아니예요

무례함과 천박함과 폭력성은 넷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을 넷의 속성이 되게 하려는 거대한 하나의 조류가 있음엔 틀림없지만요

그 조류가 당연시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지함이 수치스런 주홍 글씨가 되지 않았으면요

기분탓인지 모르죠, 하지만

아무튼, 요즘 온라인 분쟁엔 조롱이 너무 많아요






가끔 우리는 즐거운 기독교인 티타임 놀이를 했지

바비 인형과 차와 토스트를 놓고

그런데 내 친구가 말하는 하느님이랑 부처님 레고 풀세트를 가지고 온 거야

'우리 할머니가 지저스 액션 피규어 풀세트 사줬다' 자랑하면서


우리는 종종 즐거운 기독교인 티타임 놀이를 하지

바비 인형과 차와 토스트를 가지고

우리가 즐거운 기독교인 티타임 놀이를 할 때

대통령 역할은 내 차지야


내 게임이 맘에 안 들면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널 화형시켜버릴테니까


내 게임이니까 내 맘이지

이건 내 세계고, 내 맘대로 할 거야

내가 미쳤어도, 내가 왕이야

라라라라라라




oh no, oh my

the genocide ball

crispy christian tea time

all songs from the robot ate me

translated by lonegu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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