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째 밤새우고 있는데 어젠 유독 능률이 확 떨어졌어요. 틈만 나면 듀게에 들어와 글 보고 제 글에 끈질기게 답을 달고 하느라구요. 눈팅만 하던 시절 너무 끈질기게 답을 다는 사람을 보면 좀 피곤했는데 정신차려 보니 제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더군요.


한참 논쟁하던 끝에 아주 정답고 우호적인 태도로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는 '너 참 세상물정 모르게 순수하구나 안쓰럽다. 미국 사니까 한국이 얼마나 ㅈ같은지 모르는구나. 내 나이 되어보면 알게다' 하고 몇 번씩 강조하며 논쟁을 마무리짓는 분을 마주쳤는데 순간적으로 굉장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건 반칙이거든요. 동등한 논쟁의 상대가 아니라 물정모르는 애한테 세상살이 가르쳐줬다는 식이니 정말 더럽게 반칙이죠. 어제인가 그제 게시판에서 조분조분 말하는 척하며 공지영의 사생활을 비열하게 까내린 박해현이 욕을 먹었듯, 아무리 웃는 얼굴 이모티콘을 뒤발해도 깔려 있는 사고방식이 상대를 철부지 취급하며 나이로 뭉개려는 거라면 욕 먹어야죠.


연식을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제 나이가 되어보니 다수의 기혼자와 소수의 비혼자, 다수의 자녀를 가진 사람과 소수의 그렇지 않은 사람이 주변에 섞여 있습니다. 자발적 비혼자도 많고 자발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도 예상 외로 많습니다--이건 모르겠어요, 난임이 요즘 워낙 민감한 화제이다 보니. 그러다 보니 저와 논쟁하던 분처럼 나이 있고 결혼했고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 아주 무신경하게 말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세상이 달라진다느니 한 차원 다른 성숙을 경험한다느니 하는 명제들에 바로 바로 반론이 제기되는 걸 보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 당연히 희생이 뒤따르겠죠. 그런 희생을 통해 사회를 지탱해나갈 구성원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아이를 가진 사람들이 복지 혜택을 보는 것도 맞고, 당장 내 부모를 생각하면 콧등이 찡해지듯이 그런 노고를 치하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혼과 자녀가 그 사람을 비혼, 무자녀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우위에 놓는 조건은 아니죠.


MB 도 결혼을 했고 자녀가 있으며, 그 자녀들에게 끔찍해서 전국구적으로 욕을 먹으면서도 자녀들의 영달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력한 예에서도 볼 수 있듯 결혼하고 자녀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낫고 인격적으로 성숙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말하지만, 그 희생이 사회를 위한 건 아니거든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내가 아이를 갖고 싶어서 낳았고, 호르몬의 작용과 양육과정에서 형성된 애착관계를 통해 그 아이를 미치도록 예뻐하게 되는 거지 사회에다가 미래의 인력을 낳아주려고 아이를 가진 건 아니죠.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바쁘고 힘들죠. 그러다 보면 생활과 사고방식이 아이를 중심으로 편제됩니다. 자기를 계발하고 주변과 교류할 시간에 희생이 가해질 수밖에 없고, 인격적인 성숙을 주장할지 모르나 아이를 떼어놓고 개인으로 볼 때 어떤 면으로는 정신적인 성숙이 멈출 가능성이 높죠. 게다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구요. 하다 못해 아이를 이유로 미혼인 친구들의 스케줄을 배려하지 않고 만나려고 하는 것, 미혼인 친구들에게 결혼 부조금, 출산과 육아 선물도 받지만 그들에게 선물이나 밥을 사줄 수 있는 씀씀이는 자기도 모르게 줄어드는 기혼자들의 예만 봐도 의도하지 않은 이기심이 읽히는걸요.


몇 달 되었나요. 게시판에서 아이를 가져야만 성숙한다고 주장하시는 분의 댓글에 매우 피곤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데 계속해서 낳아봐야만 알 수 있다는 태도를 고수하시더군요. 그 때도 말씀드렸지만, 경제적으로 사정이 되지 않아 미루는 사람, 난임으로 울고 괴로워하며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에서 애를 갖고 키웠다는 것만으로, 그리고 힘들게 키운 데 대한 보상심리로 결혼과 육아를 특권화하는 걸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인간이 성숙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애를 열을 낳아도 민폐를 끼치고 미성숙합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더 테레사도 결혼하지 않았고 애가 없었습니다. 비혼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를 그들과 동급으로 올려놓으려는 뻔뻔한 시도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말해온,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야 어른으로, 성숙한 개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고관에 요즘 들어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게 보입니다. 내밀한 인간관계에 부과되는 희생과 양보가 미덕임은 분명하지만, 그게 다른 미덕을 압도하는 미덕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저는 그 균열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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