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시험, 오늘도 시험. 신경을 잔뜩 썼더니 신체의 배터리가 방전되는 게 느껴지더군요. 그런 전차로, 집에서 가까운 맛집인 홍릉각을 방문했습니다. 30분 정도 운동삼아 뚜벅뚜벅 걸어갔.... 으면 좋았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인간적으로 날이 더웠습니다(....)




제기동 경동시장까지 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미 등에서는 땀이 콩죽처럼 흘러내립니다. 보양 목적은 잊어버리고 날이 너무 더운지라 콩국수나 시킬까 - 하려니까, 중국식 냉면 6천원.이라는 메뉴가 들어오더군요. 바로 한 번 주문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일단 겉보기에는 여느 화교 중국집과 다름없는 중식냉면이 나옵니다. 팔보채나 양장피에 들어가는 베이스 같은 고명이 몽땅 올라간 듯한 비주얼에 땅콩버터. (이 집은 아예 대놓고 '땅콩잼(버터를 잘못 말씀하신 듯..)이 들어 있으니까 잘 풀어서 드시고 겨자 쳐서 양념하세요' 라고 말을 해 줍니다.) 거기에 동동 떠 있는 살얼음 육수까지.




그런데 한 입 먹는 순간, 왜 안주인 아주머니께서 저렇게 말을 했는지 알겠더군요. 다른 데서 먹어 본 중식냉면과 달리 새콤한 맛이 전혀 없습니다. (겨자를 뿌리면 그럭저럭 새콤해집니다.) 심지어 고소하기까지 합니다. 콩국수의 느낌을 내기 위해 땅콩버터를 푸는 경우가 많고 이 집도 그렇지만, 버터 덩이를 풀지도 않고 그냥 면만 한 입 베어무는데 입 안에 고소한 향내가 확 퍼지더군요.

- 아 그렇지. 이 느낌. 예전에 이 곳 홍릉각에 와서 면/밥류를 먹을 때마다 항상 느끼던 맛이었습니다. 그 때는 음식들이 죄다 뜨거워서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 그래서 이전 포스팅 보면 '볼륨감 있다'라고 에둘러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 구수한 게 기름 베이스기는 한데 기름이라는 단어가 갖는 뉘앙스 중 하나인 느끼함은 별로 없었기에... 그렇다면 라아드는 아닐 거고, 대체 뭘 쓰는 건가. 원인 모를 감칠맛 종류도 아니니 조미료 쪽도 아닐 것이고, 대체 뭐가 베이스지?? 라며 혼자서만 궁금해하던 상황. 사실 제가 그렇게 해박한 입맛은 아닌지라;;

그러던 것이 오늘 이처럼 음식을 차게 해서 먹으니까 조금 감이 오더군요. 아무래도 베이스로 쓰는 재로가 면실유가 아닌 '콩기름'인 것 같습니다. 이 중식냉면을 먹어보고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구수한 맛은 홍릉각 면류/밥류의 가장 특징적이면서도 기본이 되는 풍미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 사진에서 보는 특밥도 그렇고, 아래쪽 사진의 짜장도 이 풍미가 매우 잘 어울립니다.

퓨전 스타일을 추구하며 되도록이면 가볍고 산뜻하게 변화하려는 최근의 국내 중화요리계 추세와는 정반대이지만, 정말 어느 분 말마따나 "예전에는 중화요리가 이런 맛이었어!" 라며 그 시절의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달까요. 비록 라아드는 아니지만.... (사실 지금 와서는 세월이 너무 흘러서, 라아드로 볶은 중화요리 맛 자체가 가물가물할 지경입니다.)

단지 짬뽕에는 이 구수함이 그렇게 썩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구수한 짬뽕 - 가끔씩 특이한 맛으로 먹을 만하지만, 역시나 짬뽕은 탕면처럼 좀 칼칼하면서도 해물 특유의 시원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어쨌거나 홍릉각의 풍미는 특히 이 짜장에 매우 잘 어울립니다. 솔직히 서울 시내에 3500원에 이 정도 퀄리티를 내는 집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베이스 자체도 구수하지만 거기에 갈아넣은 고기와 양파가 풍미를 한층 북돋습니다.





덧.
이 집 식구들로 보이는 사진. (뒷모습이니 초상권에 크게 구애받진 않겠죠...)
안주인 아주머니는 주방에서 면 뽑고 있네요.
실제로 가끔 웍까지 잡는 건 아니더라도, 면 정도는 아주머니가 뽑을 때가 있습니다.

이 날 식사를 하고 있는데 주인장 내외와 딸 그리고 남자분(아들인지 사윗감인지 잘 모르겠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귀에 들어오더군요. "아, 양장피가 어째서 양장피인 줄이나 알어? ...(중략)... 그러니까, 그 양장의 양이란 게, 기르는 양두 아니구 두 양자를 써서 양장피, 라고 한다 그거야." "아유, 아부지 말 들으니 난 왜 그런 거 모르고 있었을까." "너두 말야, 어디 가서 중국집 애입네 허면 이 정두는 알아야 할 것 아니니." 타향살이 10년에 가족간의 단란한 대화가 참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덧덧.
이제는 얼굴이 익어서인지, 들를 때마다 아주머니가 사진 많이 찍었냐고 물으시더군요. 무슨 맛 동호회 같은 데서 많이 들르는 모양입니다. (....근데 거기에 와인을 갖고 간 모양이더군요. 쿨럭. 어울리... 려나??;;;) "사장님 사진 많이 찍으셨어요? 요새 인터넷에 올려 준대구서니 막 찍어들 가시드만. 잘 찍으셨나? 얘기해 주면 우리야 고맙지만."



... 아니 아줌마... 이젠 아저씨도 아니고 사장님이래. 으허헝

저 아직 외국 나가면 이십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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