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카, 우드스탁, 야구

2012.06.08 11:21

lonegunman 조회 수:1659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열에 서있어

시계바늘은 움직이지만 사람들은 멈춰있지


모두들 내게 하는 말이 달라

모두가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야

모두들 내게 다른 말들을 해

서로 하는 말이 달라


보이는 걸 넌 모두 믿고 있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믿어지니

네 눈 앞의 광경이

세상은 정지된 바퀴야

움직임은 환상이야

대기열에 정지된 채 모두 시간을 소진하고 있어

믿어지니

이 모든 게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삶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매일 시간을 허비하고

모두들 손에 쥘 수 있는 건 모조리 소유하려 하지만

아둥바둥 발버둥만 칠 뿐이야

모두들 최대한 많은 것을 가지려 하지만

주어진 건 그다지 많지 않지


네가 느끼는 것들이 다 진실인 것 같니

아무도 내 생각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아


믿어지니

네 눈 앞의 광경이

정지된 바퀴처럼

거짓된 세상

대기열에 선 채로 시간을 소진하고 있어

믿어지니

이 모든 게



난 외칠 거야, 비명을 지를 거야

하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겠지

그냥 또다른 내일 뒤로 숨어버릴까


믿어지니

네 눈 앞의 광경이

세상은 정지된 바퀴야

움직임은 환상이야

대기열에 정지된 채 모두 시간을 소진하고 있어

믿어지니

이 모든 게


모두가 하는 말이 달라

무얼 믿어야 할까

모두들 끝도없이 소유하려고만 들지

손에 잡히는 건 뭐든지





...............


렌카의 the show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이 노래가 우드스탁 노래라고 생각했어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거의 즉각적으로 그랬죠.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이 개봉했을 때 이대 모모에서 봤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일행과 밥을 먹으며 우드스탁의 배경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고 있었죠. 좀 창피한 얘긴데 열심히 밥을 먹으며 우드스탁이 어떤 공연이고 라인업이 얼마나 대단했고 이 영화는 어떤 얘길 다룰 거고를 담담히 늘어놓다가, 히피들이 몰려와 우드스탁의 담장이 무너지는 대목에서 덜컥 울었어요. 길게 운 건 아니고 그냥 입구가 부서지고 담장이 무너지고 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이 안 나오고 울컥. 라디오헤드의 가르침을 받잡아 (공공장소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말라) 20대 중반 이후론 지하철에서 책을 보다 눈물이 핑 돌거나 영화를 보다 눈물이 났는데 마침 동행이 있었거나 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는데 말이죠. 그 대목이 너무 아름다워서 언제고 감정이 복받친다고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며 변명하는 저를 보고 일행은 어찌나 벙쪘던지. 아, 창피한 얘기예요.


성난 관중들이 몰려와 기물이 파괴되고 무질서와 혼란이 야기되는 이야기가 아름답기는 아주 힘들죠. 하지만 애초부터 유료라기엔 끔찍하게 조악한 시설과 열악한 음향과 음습한 날씨와 을씨년스런 진흙구덩이의 우드스탁과 그 열악함을 그 자체로 즐기는, 혹은 열악해서 오히려 더 즐거운 히피들이 만나면 얘기가 달라지죠. 매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입구는 붕괴된 채로 거의 무료 공연이 돼버린 우드스탁은 백 만 단위의 어마어마한 적자를 낸 채 끝나고, 끝나자마자 그 자체가 전설이 되어 결국은 천 만 단위의 흑자를 기록하죠. 결국은 이 또한 자본주의의 논리이겠지만 결과가 이렇다보니 누구도 그때의 사건을 성난 관중의 난동으로 치부하지 않게 됩니다. 사실 입구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냥 유료 공연으로 끝났다면 우드스탁은 희대의 허접한 환경에서 치뤄진 초호화 공연으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죠. 담장이 무너지고 역사는 영원히 바뀌게 된 겁니다. 와, 안 울고 말했어.


땅은 원래는 다 지구꺼지, 누구의 것도 아니었는데.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지만 주위를 빙 둘러보면 문득 문득 우습다기 보다, 화가 난다기 보다, 그냥 황당해질 때가 있어요. 금 그어놓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내꺼라는 발상- 인간이, 어떤 개인들이 멘틀층 위의 지각을 소유한다는 발상이 너무나 진지하게 먹혀들어가는 이 모든 방식이. 우습다기 보다, 화가 난다기 보다, 그냥 황당한 겁니다.


2008년의 5월부터 6월, 촛불을 들고 광화문 한복판의 대로를 직선으로 대각선으로 마음 내키는대로 걷고 뛰고 누비며 든 생각도 쌩뚱하게 그것이었어요. '이렇게 넓은데' 지금도 가끔 교보문고로 가는 좁은 보도에서 인파에 치일 때면 바로 한 걸음 옆의 넓은 차도를 보며 2008년의 여름을 떠올리곤 합니다. 부대끼는 좁다란 보도에 멍하니 선 채로, 2008년 그때가 아니었으면 평생토록 활주할 일이 없었을 그 넓디 넓은 도로를 바라보며 말입니다. 정말로 무너진 건 없었지만, 그것도 일종의 담장을 무너뜨리는 행위였을 거예요. 정말로 무너진 건 없었지만.



//

야구는 원래 담장이 없는 초원에서 하던 경기였다. 사람들이 경기를 보기 위해 입장료를 지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담장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그 성격을 보존하기 위해 보통은 담장들을 경기하는 곳으로부터 멀리 설치하였다. 초원에서 경기할 때처럼, 초창기 메이저리그의 홈런은 보통 그라운드 홈런이었다. 그것은 삼루타의 연장일 뿐이다. 선수들은 야수들의 키를 넘기는 공을 때리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라인드라이브가 왕이었고, 모든 선수들은 공을 똑바로 치고 높이 뜬공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10년부터 1920년 사이에 메이저리그 팀들은 모두 부동산 값이 비싼 도심에 구장을 건설했기 때문에, 담장은 더 가까워졌고 본격적인 야구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수, 코치, 감독, 구단주들 모두 여전히 야구 경기를 초원에서 하는 경기로 알고 있었다. 코치, 감독, 소유주들은 여전히 선수들이 라인드라이브 치는 것을 장려했다. 그때 체구가 큰 왼손잡이 투수가 등장했다. 그는 투수인데다 타순도 9번이었기 때문에 타격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그는 배트로 스윙하는 것을 좋아했고, 배트를 뒷꿈치에서부터 크게 힘껏 휘둘러서 주기적으로 홈런을 쳤다. 그의 큰 홈런의 가치를 인식한 후, 보스턴 레드 삭스는 베이브 루스를 4일에 한 번씩 나오는 투수에서 매일 나오는 외야수로 보직 변경했고, 그의 홈런은 야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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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물리학은 꽤 건조한 문체로 쓰여진 책이죠. 그래서 그저 덤덤히 읽어나가다가 책의 후반부 이 대목에 이르면 하릴없이 감상적이 되고 맙니다. 무슨 전기의 일부처럼, 영웅담처럼 튀는 어투 때문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보다는 모든 룰과 관중과 담장까지 모두 다 지워버리고 초원 위에서 사내들이 캐치볼을 하는 야구의 기원으로 독자를 데려다 놓는 도입부 탓이 더 큽니다.


가끔 거기서 야구를 생각해보곤 하거든요. 드넓은 초원에서 캐치볼을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말입니다. 그 단순한 공놀이에서부터 현재의 가장 지저분한 규칙 -예를 들어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같은- 까지의 논리를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복기해보면 모든 것이 이치에 닿는 것이 가히 아름답습니다. 우습지도, 화가 나지도, 황당하지도 않은 거죠. 마치 멘틀층 윗부분의 소유권을 주장하듯 누군가는 담장을 치고 야구의 소유권을 주장하겠죠. 그러나 야구는 수시로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지각층에 붙어 있는 티끌같은 생명체들이 감히 소유하고 말고 할 수 없는 것임을 스스로 증명해보일 겁니다. 공이 경기장 밖으로 이탈해도 아웃이나 에러가 아닌 희한한 게임, 담장을 치고 입장권을 받고 아무리 애를 써 소유권을 주장해도 인간은 야구를 담장 안에 가두는데 실패했다는 아름다운 증거.



그리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야구 영화 '머니볼'에서 렌카의 the show가 흘러나옵니다. 쇼, 우드스탁, 야구, 담장... 렌카의 원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역시 코러스와 함께 합창하는 곡 후반부의 환불 소동인데요, 머니볼에서 딱 그 부분을 개사해 불렀지만 아쉽긴 커녕 적절하기가 이를 데 없었죠. 가사는 달라도 원곡의 환불 소동처럼, 우드스탁의 히피처럼, 야구장의 공처럼, 광화문의 촛불처럼, 아이는 아버지의 담장을 무너뜨리려던 거니까요. 정말로 무너지는 건 없어도, 인생은 환불되지 않아도 말입니다.







1964년에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는 게 열렸는데 
40만이 넘는 사람들이 록 콘서트에 모였지 
사랑과 평화의 제전이라고들 했지만.. 

어차피 세상은 다 돈이야 
돈이 없었으면 
그런 쟁쟁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줄 리 없거든... 

하지만 밀려든 군중들 때문에 
게이트도 담장도 다 부서지고.. 
어느새 무료 콘서트가 되어 버렸지. 

어차피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지만, 
그게 다는 아니야 

진짜 마음먹고 승부를 걸면... 
뭔가 무너뜨릴 수 있는 거야 



-20세기 소년






날이 덥습니다, 여름이로군요






갈 길은 먼데 움직일 수가 없어

삶은 미로같고 사랑은 수수께끼같아서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어

아무리 애를 써도 혼자서는 안 되겠어

왜 이러는지 나도 정말 모르겠어


이건 너무 빨라, 그만 멈춰줘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아

안 되겠어, 이건 너무해

내가 아닌 채로 살아갈 순 없어

난 바보야, 사랑 안에 머물 줄을 모른 거야

만족할 줄을 몰라서 여기까지 온 거야


도중에 멈춰선 채 나아가질 못하겠어

삶은 미로고 사랑은 수수께끼야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

해보려곤 했지만 혼자선 못하겠어

대체 왜 이런 걸까


난 그저 길을 잃은 어린 소녀일 뿐인데

너무나도 무섭지만 내색해선 안 되겠지

도무지 모르겠어

절망스럽지만, 알아

단지 숨을 좀 돌리고

이 쇼를 즐기면 된다는 걸


하늘 위에선 태양이

거대한 스포트라이트처럼 뜨껍게 내리쬐는데

사람들은 한없이 차례를 기다리며 

표지판을 따라가고만 있어

웃기는 일이지

모두들 자기가 이미 입장권을 쥐고 있다는 것도 몰라



내 돈을 돌려줘요

내 돈을 돌려줘요

입장권은 이미 있다고요

이 쇼를 즐길 권리가 있어요


내 돈을 돌려줘요

돈은 낼 필요가 없어요

아무것도 필요 없죠

그냥 이 쇼를 즐기면 되는 거예요





in the waiting line / zero 7

the show / lenka

translated by lonegun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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