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밤 조마조마하게 결선 진출 여부를 기다리다 번복을 확인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알람을 맞춰두고 잤는데도 결국 생방은 놓쳐버렸어요. 예전같으면 그냥 안 자고 기다렸을텐데, 나이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힘드네요. 영국의 프라임 시간대가 한국에서는 새벽 3, 4시 경이라 앞으로 남은 경기들을 몇 개나 본방사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박태환 선수가 한국인이니까 응원하는 것도 분명 있지만, 상대적으로 아시아 - 특히 한국 - 선수들이 신체적 조건에서 불리한 출발점에 놓일 수 밖에 없는 기초 종목들에서 선전하는 선수에 대해 응원하는 마음이 더 큽니다. 종종 다른 나라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신체조건을 타고나 좋은 모습을 보이는 선수들도 있고, 그들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 선수는 신체조건이 사실 불리하죠. 그런 상황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 정상급의 위치에 올라간 거 감동적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배우게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사실 결선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메달권에 들지 않아도 좋다, 다만 박 선수가 연습해 왔던 모든 걸 온전히 쏟아넣은 경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박 선수가 출발과 관련한 큰 트라우마가 있기도 한데, 오전에 그런 일을 겪고 사실상 400m 경기를 포기하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던 상황에서 아주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닐까 생각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해보니, 세상에 2위를 했더군요. 새삼 정말 대단한 선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는다고 해도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스타팅부터 대담하게 잘 했더라구요. 비록 마지막에 쑨양 선수에게 역전 당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선두를 유지하며 레이스를 이끌어가는 박 선수에게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요. 종종 우리나라 사람들은 금메달이 아니면 성과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객관적으로 볼 때 정상급 선수가 나오는 것 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상황에서 올림픽에서 두 번 연속 메달을 획득한 거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수십년 안에 한국이 다시 저런 선수를 가져볼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박 선수가 결국은 눈물을 보이며 다음에 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지요. 기사만 보고 아직 인터뷰를 보지는 않았어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실격에 휘말리고, 멍청한 방송국 인터뷰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고, 피말리는 몇시간의 기다림 후에 겨우 결선을 치뤘던 거. 생각해보면 얼마나 끔찍한 하루였을까 싶습니다. 이 상황에서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걸 질책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런 사람들은 신경쓰지 말고, 어제의 기억은 다 털어버리고 남은 경기 차분히 잘 준비해서 후회없는 경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2. 저는 여자배구의 오랜 팬입니다. 정확하게는 여자대표팀이자 (몇 년간) 호남정유의 팬이에요. 주변 친구들이 대학 농구와 농구대잔치에 열광하던 시절부터 대표팀 경기와 호남정유 경기는 꾸준히 챙겨봤었어요.

이유는 어쩌면 박태환 선수를 응원하는 것과 비슷할 거 같아요. 처음 봤던 경기가 월드리그에서 쿠바와 경기를 펼칠 때였는데요, 누가봐도 신체적 차이가 명백한 두 팀이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쿠바나 러시아 선수들의 공격이나 서브는 남자선수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힘과 탄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무시무시한 공격들을 한국팀은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꼼꼼한 수비로 다 받아내고, 힘에서는 밀려도 정확도만큼은 앞서는 공격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구기종목은 수비위주 경기들이 좀 심심할 수도 있지만 여자대표팀의 경기들은 전혀 심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물론 희대의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죠. 아직도 이도희 세터나 정윤희 선수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호남정유가 엘지정유가 되고, 선수들의 전성기가 지나가면서 대표팀 특유의 분위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고, 한국 특유의 조직력 배구를 다른 나라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국제대회에서의 한국팀 위상이 달라진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경기는 재밌습니다.

남자팀의 올림픽 진출은 실패했지만 여자팀은 무사히 진출에 성공해서 이번 대회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자팀이 속한 B조는 최강 미국을 포함해 브라질, 중국, 세르비아가 포진한 죽음의 조라 예선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긴 해도 다섯경기는 볼 수 있으니 그만으로도 좋다 싶어요.

그런데 좀 화나는 기사를 봤어요. 한국 협회에서 대표팀을 전혀 지원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군요. 대표팀이 영국으로 출발할 때는 물론이고 도착한 이후에도 협회에서 지원인력을 보내주지 않아 이런저런 행정업무를 감독이 다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고, 올림픽 진출하면 주겠다던 격려금 1억원도 집행되지 않았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서 양궁 협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된 협회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여자대표팀이 메달권에 드는 게 힘든 일이라는 것도 남자배구에 비해 인기가 많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올림픽 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 협회는 어떤 이유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 기사를 본 게 며칠 전인데 지금이라도 인력을 파견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에서 대표팀은 미국팀을 만나 잘 싸워주었어요. 비록 3:1로 지기는 했습니다만, 남은 경기에 더 큰 기대를 할 수 있는 경기내용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김연경 선수는 29점이나 득점했구요. 앞으로 남은 경기들 중 만만한 팀은 없지만 열심히 싸워서 꼭 8강, 4강에 진출했으면 좋겠어요. 멍청하고 게으른 협회에 한 방 먹이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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